[베껴쓰고 다시읽기] 석 달만의 화해, 거짓말로도 '보고싶었던' 말 (황인찬, 기울이기) :
신춘문예, D-44.
가장 최근에 쓴 글들을 보면 주로 예전의 정호승이라거나, 진은영과 이제니의 신작들 몇을 꼽았던 것 같습니다.
어저께 읽은 박준의 산문인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역시 꽤 많은 반성들을 갖게 만드는 좋은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번 연재에서도 이 글이 그 '마지막'이 아닐까 해 되도록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을 법한 전범들을 꺼내보고자 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기억을 돌이켜 올 한햇동안 남의 글을 읽고 얼마나 울었을까도 잠시 헤아려 봅니다. 연초에 한겨레에서 읽었던 한 할머니의 사연이 대뜸 먼저 생각났어요... 일흔 평생을 한글도 없이 살던 분은 유방암 수술을 받고 "5년만 더" 살아달라던,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처음 시를 썼다고 고백합니다. 문장은 고루하고 투박하여도 그 진심을 읽어내는 동안은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몇 번을 읽어도 자꾸만 울음이 터지기만 한 박노해 시인이 아주 예전에 썼던 '너의 하늘을 보아'를 또 한차례 더 읽으며 그의 진정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해보기도 한 올해였지 싶습니다. 절망의 시절을 극도로 승화해낸, 아름답기가 그지없었던 진은영 시인의 빼어난 수작인 '청혼'에서 어쩌면 한줄기 희망을 보았다면, 아마도 가장 큰 좌절과 인내를 요구했던 시기에는 황지우 시인의 오래된 습작인 '뼈아픈 후회'도 함께 있었습니다. 또 어느 시기에서는 한때의 '필화' 사건처럼 여기기도 한 황인찬의 새 시집에 얽힌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 모처럼 황인찬 시인의 신작을 한 편 꺼냅니다. (이제 벌써 몇 달 전의 글이지만) 또 다시 낙방의 고배를 마셨던 <문학사상> 6월호에 실렸던 그의 '기울이기'는 짐짓 너스레를 떤 선배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가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한 사람의 글이 그 사람의 마음 자체라는 걸 늘 잊지 않고 살아온 편이기에,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심사평>에서 담담히 남겨놓은 이제니 시인의 다정한 위로처럼 깊은 우정을 느끼진 못하여도 그 사람의 마음이 갖던 그리움과 슬픔과 애처로운 삶에 대해선 최대한의 존중을 먼저 표해두려고 합니다. 그게 곧 글을 쓰는 사람이 갖는 가장 기본적이어야 할 덕목이자 예의라고도 생각합니다.
아직은 이른 새벽, 이제 곧 아침이겠습니다. 가을이 제법 무르익고 있습니다.
각 회사들에선 이르면 이번 주 또는 이달 말까지로 해 각각의 조직 및 인사평가가 치러질 전망입니다. 제 직장 역시 지난 주까지로 해 조직평가를 마치고 오늘과 내일까지는 각 개인별 인사평가가 있을 예정이고요. 해마다 조직과 개인을 '평가'한다는 게 참 이해못할 처사이긴 해도, 그들마다 각각의 이해와 사정은 있으리라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마치 해마다의 문학상을 놓고 시인들을 견주어야 할 처지나 형편들처럼 또한 마찬가지라고도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요.) ;
기울이기
혼자 있을 때면 아무도 듣지 않을 말을 합니다
죄송합니다, 라거나
보고 싶어, 라거나
몸을 웅크리고 시선을 위족 어디에 두고 조금씩 몸을 흔들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애써 누르듯이 이야기합니다
혼자 있어야 진정으로 고백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고백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설정이 있으니까요
초인종이 울려도 나가지 않고
제발 뭐라도 먹자고 문을 두드리며 애원해도 답하지 않고
발끝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차가운 죽음을 느끼며
약간의 만족감 혹은 위안을 얻기도 하는 시간
죄송합니다
약간 설정이 과했군요
설정을 무르고 나면 제가 열지 않은 문이 멋대로 열립니다 가까운 사람, 모르는 사람, 모두 몰려들기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언성을 높이고, 누군가는 울기 시작합니다
그런 혼돈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죄송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뿐이군요
거짓말이지만
- 문학사상 6월 (문학사상,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