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단 한 편의 '당선작'을 뽑는다면? 마지막 시뮬레이션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
"한번도 슬픔을 완성하지 못했고 완성된 것은 슬픔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새벽 거리를 떠도는 불빛 하나가 빗물 고인 웅덩이에 내려와 푸르스름한 떨림을 이루고 있다. 그 속에는 몰래 꿍쳐둔 빨래처럼 잎들이 가지에 꾸욱 달려 있다... 구름, 하늘의 자락이 한쪽 부서진 자리, 파란 눈빛 속에 잃어버린 주소지를 담고 있는 집 나온 고양이, 짙은 숨소리, 고동, 빗물 고인 웅덩이." ('시인의 말' 중에서)
<'리얼'할수록 '모던'하여야 하며, '모던'할수록 '리얼'하여야 한다.>
본 연재의 맨 마지막 글입니다. 신춘문예는 이제 한 달 보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신춘문예를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시인으로 평가받기도 한 그를 환갑에 육박하는 나이임에도 굳이 2023년의 오늘에 또 다시 호출하게 된 건, 이 '모던'한 시대에 오히려 '리얼'에 가까울 법한 이 작품을 꺼내드는 건, 여전히 현대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최고의, 최후의 덕목이라 할 '형상화'를 내비치려는 까닭입니다.
1994년의 데뷔시집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국어는 한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만큼의 어떤 한 경지에 사뿐히 다가섰다는 느낌을 얻습니다. 또 그만한 '한계'와 그늘을 가진 셈일 텐데, 그 '한계'마저도 끌어안을만한 '미덕'을 함께 갖추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소멸의 아름다움처럼 모든 '한계'의 아름다움 역시 믿는 편이기도 합니다.
출판사에서 소개한 글에도 나온 실존적 물음, 이미지의 색채, 근본적인 명제 등도 결국 '체험'과 '사유'의 힘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저 역시 제법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나온 지금, 그 다음의 숙제를 앞두고 숨가쁘기만 한 오전 일과 속의 편지를 맺는 속마음에도 여전히 불멸해온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 궁핍한 삶의 도저한 과정을 향한 고독한 '자기애'였거나 너를 나로 일컫고자 한 수줍은 '인류애'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차가운 공기, 맑은 하늘, 찬란한 석양, 낡은 나뭇잎처럼 일상의 사사로움을 민감히 여긴 나날들이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삶이 설령 그리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더 한층 아름다워지기 위한 노력은 또 그만한 힘을 갖는다고도 여깁니다.
항상 어렵사리 '건필'에 대한 희미한 약속을 부탁드려온 까닭이기도 합니다.
졸필에 관한 따뜻한 격려와 응원 역시 항상 잊지 않고 정진하려 합니다.
올해에는 경향 신춘문예 한곳에만 시, 소설, 평론을 응모할 예정입니다.
심사대 위에서 다시 반갑게 만나게 될 인연을 또 얻으리라 믿겠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오후시간 되십시오. ;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 어슬렁 낮아지는 저녁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간다
퇴근하는 한 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에 맞춰
피멍울 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나온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호흡을 나누는 일 나는 기다려본다
이제 사물의 말꼬리가 자꾸만 흐려져간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저녁의 희디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강물로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 밤에 사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
지붕에 널어 말린 생선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용암(熔岩)처럼 흘러다니는 꿈들
점점 깊어지는 하늘의 상처 속에서 터져나온다
흉터로 굳은 자리,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 다 떠나보내련다
순한 개가 나의 육신을 남겨놓고 눈 속에 넣고 간
나를, 수천만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고 있는
멀리 키 큰 옥수수밭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릴 때
*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