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대산문학상, 김수영, 그리고 신춘문예 (양안다,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내가 내 문제를 끝낼 수 있게 도와줘.
우리가 혼절한 단어를 너무 많이 받아 적었잖아.
우리는 해롭고 틀린 방식으로 기절합니다. 새벽이면 우리의 방에 청색 리듬이 필요합니다. 등불이 밤새도록 헤엄치고. 목구멍은 가끔 악기가 되어서. 슬픔에 잠긴 돌, 이름을 붙여줄까요? 중력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무너지는 집을 떠나야죠. 척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유연함은 우리의 전공입니다. 그래요. 새벽에 적응하지 못한 짐승이 졸도하는 시간이에요. 어두운 숲에서 눈뜨고 잠든 건 나무가 아니라
우리였습니까?
짐승이 되는 꿈은
해일을 일으킨다. 악몽은 당신을 가파른 협곡으로 몰아붙인다.
당신의 발에 두 손을 얹을게. 새벽 욕조의 푸른색으로.
온수입니다. 물속에서 빛나는 우리 발목을 봐. 어떤 어류가 우리를 간질인다.
피울 때마다 안개가 드리웠지요. 입맞추기 전에 기도를 가볍게 올렸어요.
우리는 인어의 방식으로 익사하지 않는다.
잠깐 잊은 꿈을 말해줄게.
그 꿈에서 우리는 온순한 짐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작은 나룻배가 적란운 사이를 떠다녔지.
당신은 악몽을 떨쳐내려 밤의 악보를 소리 내어 읽었어.
가라앉은 문장들이 우리의 목소리라고 하지 말아줘.
멀고 공허해. 텅 빈 공간도 망령으로 가득차 있다고 믿었잖아.
별들은 오리온자리 배열로 빛나는데. 그래, 내가 잘게 흩어졌어.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지평선이 불탄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우리 반지의 테두리가 빛난다고 말했다.
당신은 내가 외면한 슬픔의 총체인 걸까.
우리는 아름다운 종류의 괴물을 천사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는데.
우리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해줘.
이곳에서 기절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좋은 부부가 될 거야.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할 거야.
알 수 없는 구름 속으로 나룻배가 산산조각나고 있어. 내가 절반 이상 죽은 줄 알았어.
그리고 가느다란 월식.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의 문을
노크할 때.
창문에서 새벽빛이 쏟아진다. 블루.
# 양안다,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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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인사드려요. 이제 9월입니다.
대한민국 문단에서의 9월은 여러모로 각별한 의미들을 갖습니다.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으로 발돋움하게 된 '대산문학상' 심사가 이제 시작되었고, 지난달 말까지로 출간을 한 올해의 신작들을 대상으로 그 영예의 주인공을 선정하는 과정이 길게 펼쳐질 시즌이 되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미등단'을 포함한 신인들만을 대상으로 해 역사적 계보를 갖는 '김수영 문학상'의 타이틀을 놓고 응모작들을 마감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기도 하죠. 한 해의 대미를 장식하면서 내년 1월 1일자 신문들을 장식하게 될 신춘문예 응모작들의 마감일 역시 이제 불과 석달도 채 남지가 않았습니다. (날짜를 세어보니 오늘이 "D-86"이더군요.)
9월은 달력만을 기준으로 해 '가을'의 시작이기도 하고요. 이른 새벽부터 9월의 첫 습작을 잠시 써보기도 했는데, 왜 문득 '화엄사'부터 생각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몇 해에 걸쳐 세밑과 정초를 즈음해 찾곤 했던 장소들인데 한동안 못 가본 탓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만한 큰 시련을 그동안 겪지 않고도 무사히 잘 지내온 편일까 하는 생각도 좀 듭니다만,
대뜸 궁금한 건 올해의 '대산문학상' 수상작이 과연 어느 작품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무릇 모든 학문들이 갖는 가장 궁극적 목표 중 하나는 다름아닌 '미래에 관한 예측'일 테니까요. 여러 씬들을 통해서도 올해 후보작들을 놓고 갑론을박해온 풍경들 역시 자주 목격했던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이맘 때에 출간했었던 진은영의 새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제일 먼저 손꼽아온 편인데, 진은영 시인은 이미 지난 2013년에 이 상을 수상했던 이력이 있습니다.)
주변의 상황이나 서점가의 풍경들만을 놓고 본다면 아무래도 황인찬의 신작인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역시 아주 강력한 후보임에는 틀림이 없겠는데, 막상 이 시집이 상을 수상하게 된다면 적잖이 실망하게 될 부분들도 꽤 많아 말은 좀 아껴두려 합니다.
올해에 들어서만 새롭게 필사를 한 시집들도 꽤 수북한 편인데, 저도 정확한 숫자를 몰라 '필사' 카테고리의 글들을 대충 세어보니 3백 권은 족히 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아주 오래된 시집들도 상당히 많았어서 작년과 올해의 시집들만 추려본다면 고작 백여 권도 안될 것 같긴 해도) 이들 중에서 수상작을 점쳐본다면? 글쎄요... 쉽게 답을 내놓기가 힘든 형편인 게 솔직한 제 의견입니다.
양안다 시인 역시 분명히 후보작들 중 하나로 손꼽힐만한 역량을 갖추었다고 보는 편인데, 올해 <현대문학> 신인추천작에서도 당선소감에 이름을 올려놓은 걸 보면 이미 충분하게 영향력을 행사해온 편임도 알 수 있겠네요. 나름대로는 신선한 시도였을 '창작동인 뿔'에서의 활동 못지 않게 개인으로도 꽤 많은 작품활동을 해온 편인만큼 충분히 또 다른 강성은, 오은, 김행숙의 포지션을 노려볼만한 시즌이기도 합니다.
안부를 몇 자 좀 적으려니 정작 시에 관한 얘기는 거의 쓰지도 못했나 봐요... 오늘의 독해는 독자들 각각의 시각에 선뜻 일임해두려는 편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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