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추억과 슬픔의 형상화가 갖는 무게감)

단정, 2025. 3. 3. 16:24

 
 
 
   오래된 여행가방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팰리건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 김수영, 오랜 밤 이야기 (창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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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과 슬픔의 형상화가 갖는 무게감 : 
 


    
   동명이인의 시인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인 편인 '김수영'이라는 세 글자가 갖는 함축적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당연히 후대의 시인은 전대의 동명이인이 남겨놓은 막대한 유산 탓에 일정 부분의 프리미엄을, 또 일정 부분의 크디큰 그늘을 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더구나 전대는 남성이지만, 후대의 시인은 여성이기도 한 까닭에) 
   하지만 그 선입견과 달리 후대의 시인이 갖는 '내공' 또한 무시 못할 것이어서, 벌써 25년이 지난 이 시집을 펼쳐보는 독자는 응당 그가 이룩해 놓은 거대한 형상화의 금자탑 앞에서 홀연히 넋을 잃고 맙니다. 뛰어난 재기를 경험하는 관객의 입장은 어떻게 그가 이토록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을까에 쏠리는데, 그게 전대의 시인과는 전혀 거리가 먼 스타일인 탓에 새삼 더 놀라움을 갖게 만듭니다. 
   아주 '오래된 여행가방'은 그저 '오래된'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고, '잃어버'린 만년필과 '돌아가'신 이모부처럼 '갈수록 가벼워지는' 추억의 매개체로 작동합니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꺼내는 그 가방은 어쩌면 세세한 기억 따위와도 아랑곳없이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도도한 쓸쓸함을 간직한 채 시를 다 읽은 독자의 마음 한편에 아스라한 슬픔을 안겨다 줍니다. (이 정도로 저릿저릿한 가슴은 전대의 시인이 써낸 무수한 시편들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되겠죠. 오히려 박재삼류의 절절함이거나 신경숙 소설들이 갖는 촘촘한 슬픔의 실타래들이 더 느껴질 법한 문장들이니까요. 여성 특유의 감성과 강점이 고루 잘 살아난 수작입니다.) 
   진작에 입춘을 지나 곡우를 거쳐 이제는 경칩으로 향하는 달력임에도, 바깥 날씨는 버거운 삭풍과 궂은 비로 인해 다소는 황막한 계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잔잔한 슬픔을 어루만지는 시 한 편을 읽는 오후입니다. 삼월입니다. 

 

 

 

   * 단정,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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