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사이좋게 지내기'에 관하여 :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듯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헤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지, 1981)
일전에 황인찬 시인을 놓고 애증적 관계에 놓인 제 글을 무어라 할 엄두가 안 나던 시절이 있었지만, 훨씬 더 길고도 오랜 악연들 중엔 유독 여성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김혜순 교수를 비롯하여 김승희, 허수경, 최정례, 김지연, 주하림, 김이듬, 김민정, 강성은, 김행숙 또 최근에는 문보영, 이소호, 안미옥, 이원하, 이다희, 김석영, 김혜린, 이정화, 이유운, 봉주연, 신원경, 양송이, 김은지, 유수연, 김해자, 박세미 그리고 이하윤과 박참새까지. (반대로는 불과 몇 안 남은 강은교, 천양희, 고정희, 진은영, 이제니, 김소연, 김경미, 권박, 임솔아, 여세실, 그리고 오산하와 강지수 정도까지를 그래서 더 한참 들여다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일련의 집합들은 때때로 '마녀들'과도 같은 이미지라서, 또 나머지 일련의 집합들은 때때금 '기계적' 혹은 '아이돌'처럼만 느껴지던 이미지라서 영 내키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후배들한테 "읽지 말고 참고만 하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무수한 세월 속에서 그들은 모두 제각각의 이름을 얻었고 그런 이름조차도 얻지 못한 제 궁색한 오기는 점점 더 초라해졌습니다. 더는 변명할 여지도 없어진 셈입니다.
문학회 동기들 중에 일명 '라이벌' 같은 관계가 있었다면 하필 그가 롤모델로 삼았던 최승자 시인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제 애증의 대상이요 가장 오랜 세월을 애써 외면하면서 지냈던 '앙숙' 같은 시인들 중 가장 대표적인 한 명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최승자, 김승희, 김혜순 이렇게 세 명의 시인을 "마녀 3인방"으로 칭해놓고 금기시하기도 했었습니다. 무려 40년도 훨씬 더 지난 시절의 이 시집이 (더구나 요샌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한자로 된 제목임에도) 이젠 황지우도 이성복도 박노해도 모두 다 사라지고 없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음도 인정해야 할 일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문득 그 이름이 생각나서 예전 시 한 편을 이리 꺼냅니다. 지독하면서 처절한 사랑의 슬픔을 그려낸다면 맨 처음 그걸 직접적 묘사로 이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며, 그 시절의 낭만 역시 아직까지는 꽤 유효하다고 보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취향은 늘 세월처럼 흐르고 변합니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니? 좋습니다.
차이를 존중하기.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선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 아닐까 합니다. 아직도 그걸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취향은 늘 세월처럼 흐르고 변하며, 그것에 대해 품는 감정 역시 그리 믿지는 않아온 까닭입니다.
'사이좋게 지내기'는 결국 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그저 '선택'의 문제일 뿐인 것 같습니다.
주말로 향하는 금요일입니다. 이번 한 주도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MEO6gYCFbr0?si=2BFDD8L7_uNBbby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