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불혹, 다음 :
내 청춘이 지나가네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 박정대, 삶이라는 직업 (문지, 2011)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놓고 그 당시의 서른과 지금의 서른이 갖는 무게감이 퍽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인생의 어느 '변곡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불혹.
과거의 '변곡점'이 서른이었다면, 이 시대의 '변곡점'은 혹 마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청춘들은 대뜸 볼멘 소리가 쏟아질 법한 얘기인데, 실제로도 대한민국 법령상의 "청년"은 만 39세, 즉 마흔을 기준으로 한다고 합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꼰대가 되어가는 시기"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워낙 길고도 긴 인생에서는 어느 한 철학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는 시기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해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십수 년전에 글로벌 경제위기와 함께 자동으로 폐기처분된 '신자유주의'며 자웅동체 격일 '포스트모던' 같은 과거의 유령들이 아직껏 강단과 문단을 장악한 채 유유히 제 권위를 뽐내는 걸 보면 지식인들의 게으름을 탓해야 할지 대중들의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지조차 무색해지기만 합니다. 지난 시기의 사회주의 몰락이 가져다준 첫번째 교훈이야말로 "게으름과 무능이 곧 노선의 오류를 초래한다"고 배웠음에도 말예요.
다행히 새로운 담론들도 여럿 새롭게 제기되곤 있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촉발된 "다시 케인즈로!"나 '파레토' 룰을 극복하고자 제시한 '롱테일' 및 마켓 3.0 그리고 "지속가능성, Sustainability" 또는 최근의 'ESG' 같은 담화들은 가장 '최첨단'의 학문을 자부해온 경영학에서 파생된 용어들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아직 사회학적, 문예사조상의 그 어떤 '시대정신'으로까지 부각되진 못했음이며 이는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통틀어서도 지적 게으름과 무능의 한 현상으로 읽고 해석해온 편입니다.
어쨌든간에, 그 어떤 새로운 '시대정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저 낡고 고루한 '옛것'을 찾고 본인의 취향과 입맛대로 윤색하기 십상이며, 그렇게 왜곡된 정서들이 마치 현재형인 것마냥 허공을 떠돌던 게 작금의 문단이 처한 상황이요 한계라면 너무 비판적으로 들릴까는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대두한 '신서정'의 화두가 단지 '전통적인' 서정시의 21세기 버전만을 뜻해선 안됨을, 그리고 그 스펙트럼 역시 기민하고 융통성 있게 잘 형성되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라면, 적어도 글쓰기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먼저 자각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의 신념, 즉 '흔들리지 않는' 스탠스를 갖기 위한 첫번째 전제조건인 <패러다임>의 문제만큼은 여전히 불분명하고도 모호한 채 그저 혼돈의 시대를 겪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메시지였음 좋겠군요.
벌써 한 세기가 다 된 옛 평론집에서 읽었던 T. S. Eliot의 "전통과 개인적 재능, Tradition and Individual Talent"를 또 다시 생각해볼만한 아침입니다.
https://youtu.be/z9ZZ_4Jcrx4?si=wzOdUuQIcjEheTv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