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신춘문예 D-36] 세상에 남길만한 단 하나의 선물, 글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10. 25. 06:05

 

 

 

[신춘문예 D-36] 세상에 남길만한 단 하나의 선물, 글 : 

 

 

   최종 퇴고 및 교정기간까지를 고려한다면 약 일주일 남짓, 그 기간을 제외하면 이제 불과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올해의 신춘문예 시즌입니다. 모든 신춘문예 도전자들은 영원한 '청춘'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남은 한 달의 시간 동안 어떤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놓을까를 고민해야 할 계절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가을이죠.) 

   얼마전에 '단평집' 한 권을 묶어내면서도 최근 5년여의 각종 신춘문예 당선작들과 주요 문학상 수상작들은 모두 다루어본 바 있습니다.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문단의 풍경 또한 사뭇 달라져왔음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죠... 하지만 여전히 신춘문예라는 타이틀 앞에선 그 모든 유행과 시절들이 그저 흘러가는 한 순간 뿐임을 새삼 자각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약 한 달여의 시간들을  습작활동만으로 메꾸기에는 여전히 촉박하기만 한데, 반대로 또 남겨놓을만한 무언가를 찾다 보면 그래도 꾸준한 일기와 편지 정도가 더 남게 될 것 같군요. 한 사람의 마음한테 한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일은 비단 편지에만 그치진 않을지언정 그래도 가능한 통로로 삼아 무언가를 전달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족할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첫 편지는 이제 '신춘문예'만을 주제로 해 이어지도록 해볼 작정인 시도의 맨 처음입니다. (매일같이 써내려갈 작정이긴 해도, 늘 게으름 탓에 꼬박꼬박은커녕 듬성듬성 빼먹는 날들도 제법 생길 터이니 크게 실망하시진 않으리라 믿겠고요. ㅎㅎ) 

 

   첫번째 주제 : "감각적인 사물의 배치와 우화적 요소에의 적절한 융합". 

    

   오늘 꺼내볼 첫 시는 진은영 시인의 가장 최근 시집인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 실린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인데요... 제가 최근에 꽤 자주 언급한 시인인 것 같습니다만, 실은 그만한 시사점들을 많이 제공해주는 측면도 있어서예요. 첫번째 화두로 꼽아보는 부분은 그만의 독특한 감각적 사유와 사물들에 대한 언급, 그리고 이들을 한데 모아서 우화적 문장으로 이끌어낸 힘 등에 주목해보려는 까닭입니다.

   이 시에서 화자는 '달팽이'를 꺼냈습니다. '당신'의 옛 추억들을 유추해볼만한 풍경들을 그려냈고, 그 작은 사연들에도 각각 이름을 붙여놓습니다. (이들은 제각각 '창백'하거나, '웅성거림'을 따라 나선 '붉은 잔' 속의 '마른 가지'일 때도 있고, 혹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일 수도 있겠어요. 때때금 '문방구 앞'과 '은유의 커다란 옷장'이기도 할 테고요. '차력사인 봄'과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내리는 눈은 제각각의 풍경들로 배치됩니다.)

   '파란 대문'과 '골목길' 또 '담벼락들' 앞에서의 '울음'들은 이제 '마을 전체'를 호명할만큼 거대한 대상으로 치환됩니다. 그 거대한 '당신'의 등 위로 풀어놓는 '사랑의 민달팽이'야말로 가장 매혹적인 사랑의 고백 한 편일 것 같습니다.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술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창백한 담쟁이 잎이 
   창문 틈의 웅성거림을 따라와 
   우리의 붉은 잔 속에 마른 가지 끝을 넣어봅니다 
   이 앞을 오가면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어 마시질 못했죠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이곳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 
   그 여름 당신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작은 아이였어요 
   아 저 문방구 앞, 떡갈나무 아래, 거기가 
   당신이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처음으로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곳이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 
   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 
   얇은 잠옷 차림으로 창문 너머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처럼 가볍게 
   들판의 귀리 싹이 몇 인치의 초록으로 땅을 들어 올리듯 
   차력사인 봄을 불러다 주세요 
   붉은 담쟁이 잎이 잔 속에서 피어나고 흰 양털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눈 내립니다 
   별과 알코올을 태운 젖은 재들 휘날립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아버지의 술냄새로 문패를 달았던 파란 대문, 욕설에 떨어져 나간 문고리와 골목길 
   널, 죽일 거야 낙서로 가득했던 담벼락들과 집고양이, 길고양이, 모든 울음을 불러주세요 
   당신이 손을 잡았던 어린 시절의 여자아이, 남자아이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잃어버린 장갑과 우산, 죽은 딱정벌레들,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와 다 써버린 산수 공책 
   마을 전체를 불러다 줘요 
  
   다리 잘린 그들의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지,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