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D-33] 글쓰기의 '정년'은? '유언장'까지입니다 :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
벌써 가을이 완연히 접어들었고, 이제 곧 단풍이 오색으로 찬란한 계절을 수놓게 될 예정이겠어요. 저도 몇년 전에야 가보았던 명소들을 (지리산이며 선운사며 또는 소요산과 산정호수와 호수공원을 또 아니면 북한산 기슭이거나 고궁 옆 돌담길이거나 또 아니라면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한적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의 단풍이든간에) 찾아볼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계절은 그렇고요.
이미 한 달여밖에 남지 않은 신춘문예 이야기를 계속 꺼낼 차례네요. 오늘은 몇 년전에 신문에 실렸던 문태준 시인의 칼럼 한 편을 소개할까 하고요. 시인은 이 글에서 신춘문예의 현 주소와 역대 당선소감들의 면면 그리고 스스로가 신인이었던 시절의 '초심' 등을 떠올리며 '후회하지 않고 앞길을 가겠다'는 다짐을 다시 새깁니다.
(어떤 길을 가려면 그 여행의 도중에 잠시라도 함께 만났다거나 혹은 또 다시 헤어짐을 겪게 되는 경우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그저 짧은 한 순간으로만 인식하게 되면 결국 그 경로의 어긋남과도 전혀 무관히 맨 마지막에 도달해야 할 정점 또는 도착하는 지점에서의 만남은 궁극적으로 동일하다는 게 제 오랜 신념이자 경험치였던 것 같습니다. 며칠 동안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 역시 그저 간단히 웃고 넘어가기만 하면 그만일 일이라는 걸 잘 알지만 잠시나마 숙고와 반성의 시간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는 건 그 과정 중에서의 '최선'이 곧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믿음 역시 내포된 까닭이고요... 많은 분들께서 이미 잘 이해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무릇 모든 작가들은 '글을 쓰다가 죽는 사람'이라고 정의를 내렸던 적 있습니다. 말년의 도스토예프스키는 병상에 누워 아내가 받아 적는 글을 구두로 써내려갔던 적이 있었죠... 결국 맨 마지막에 쓰게 될 글은 아마도 '유언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누구도 함부로 '글쓰기의 정년'을 운운할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로지 평생을 담아 해야 하는 일, 글쓰기에 관한 그동안의 생각들도 다시금 되새겨볼만한 주말의 아침입니다.
맑고도 고운 날씨가 계속된다면 하루쯤은 비좁은 노트북을 벗어나 산천의 지고지순함을 닮아볼 차례인 것도 같은 오늘이네요. 즐겁고 편안한 휴일 되시기 바랍니다. ;
(이하 인용)
오늘의 글, 문태준 칼럼 (신춘문예 당선소감을 읽으며) :
새해 첫날 아침에 신춘문예 당선작 발표가 일제히 있었다. 당선작과 심사평, 그리고 당선인의 소감이 게재되었다. 신문마다 활짝 웃고 있는 당선인들의 표정을 지면에 실었다. 풋풋한 신예들이 앞으로 맘껏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펼쳐 보일 시간이 활짝 열린 것이다.
신춘문예 관련 신문 지면을 보면서 나는 잠깐 신춘문예에 응모하던 내 문학청년 시절을 떠올렸다. 여러 날의 밤 동안 수많은 퇴고 과정을 거쳐 완성한 나의 작품을 우편으로 발송하던 때의 설렘이 생각났다. 어느 해에는 신문사로 직접 찾아가 작품을 접수한 적도 있었다. 신춘문예 응모 마감이 대개는 12월 초이고, 당선작 발표는 새해 아침에 이뤄지니까 12월 한 달 내내 애타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선 통보가 12월 20일을 전후해서 개별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대체로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기다림은 12월 31일 밤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새해 아침에는 거의 모든 일간지 신문을 사서 당선작들과 심사평을 읽었다. 탈락한 나의 작품이 심사평에 거론될 적엔 그나마 조금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해마다 그러하지만, 올해도 신춘문예 당선작과 당선 소감을 읽는 시간은 마음이 들떠 두근거리고 새롭다. 아마도 신예들의 패기와 활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선인들의 직업이나 연령 등은 다양했다.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도 있었지만, 경찰관으로 복무하고 있거나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신춘문예에 열네 번 응모해서 최종심에 여덟 번 올랐지만 아쉽게도 다 떨어졌던 사연도 한 당선자에겐 있었다. 모두들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그 간절함은 나를 엄숙하게 돌아보게 했다.
“이 당선 소감은 2018년 7월 30일 서울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 미리 썼습니다”라고 밝힌 당선 소감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카프카가 말했듯이 시인은 사회의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보잘것없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지상 생활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느낍니다. 시인이 연약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저도 미래를 걱정합니다. 20년 후에 임플란트 비용을 어떻게 낼 수 있을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감각은 깨끗하게 포장된 안전한 길 위에 있지 않습니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안정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는 그는 변방에 있는 사람들의 삶과 함께하면서 계속 시를 쓰겠다는 포부를 당당하게 밝혔다. 금전적인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누구도 글 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선뜻 선택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글 쓰는 일은 무엇보다 몹시 외로운 작업이다. 나는 이 당선인이 세상의 후하고 박한 평가에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숫타니파타’의 말씀처럼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도 같이” “저 광야에 외로이 걷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중략)
1985년 시 ‘안개’로 신춘문예 당선인이 된 기형도 시인은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의 열쇠”를 쥐게 되었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기형도 시인의 당선 소감은 아주 시적인 문장이었다. “당선 연락을 받는 순간 그 어둡고 길었던 습작시절이 한꺼번에 내 의식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모종의 힘에 떠밀려 나는 복도로 걸어 나가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동지였고 어두웠다. 도시는 흑백사진처럼 펼쳐져 있었고 많은 사람이 어지럽게, 그러나 각자 확실한 직선을 그으며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속에는 나도 보였다.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모든 사물이 무겁게 보인다”라고 써 기쁨과 함께 찾아온 비장한 심정을 드러냈다. 마치 그가 이르게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선보일 그의 시 세계를 미리 예감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정진하리라. 聖 카프카, 聖 베케트, 聖 장정일. 그 위대한 삼위일체를 위하여”라고 쓴 장정일 작가의 당선 소감도 단연 세상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하지 않았고, 계간 문예지인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이 되었다. ‘문예중앙’은 1977년 창간한 문학잡지로 지금은 재정난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내가 등단한 1994년 당시에는 꽤 오랜 전통을 지닌 문예지였다. 대학교 4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그때 내가 시상식장에서 어떤 소감을 말했는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가끔씩 나는 한 장의 사진을 통해 그 당시의 나를 잠시 만난다. 이발을 짧게 하고, 처음으로 양복을 사서 입은 스물다섯 살의 나를 만난다. 그리고 그때 내가 가졌던 시인으로서의 초심을 생각한다. 가난했어도 시를 쓰는 일 자체가 빛이요, 생명이었던 그때를 생각한다. 잠을 자지 않고 시를 썼지만 마음만은 누구 못지않게 부자였던 때였다. 쏜 화살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앞길을 가겠다고, 시인으로서의 외길을 의연하게 가겠다고 매섭게 각오하던 때였다.
1968년에 신춘문예 당선인이 된 한 소설가는 “나는 아직 젊고 그리고 고집이라는 무기가 있다”라고 당선 소감을 썼다. 뜨거운 이 당선 소감의 문장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비록 글을 쓰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우리가 당면해 있는 생활의 곤고함을 견딜 마음을 갖게 되고, 그리하여 새로운 의욕으로 파고 높은 이 현실을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