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90년대식 '신서정'이 아직껏 살아남는 이유 (박형준, 가구의 힘) :
신춘문예, D-54.
1990년대 신춘문예 당선자 출신들 중 이후의 작품성과 활동성 등을 따져 문단 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얻은 시인은 다름아닌 박형준 시인이었습니다. (예전에 그를 '형상화의 달인'이라로 소개했던 제 글도 있는데, 인용을 했던 시인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소외와 결핍을 통해 시를 쓰고, 슬픔을 의지로 전환해서, 또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벌판을 만들겠다"던 담화도 여전히 유의미한 지침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는 편입니다.)
대표작에 해당될만한 첫 시집인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와 얼마전에 창비에서 나온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에 실렸던 몇몇 수작들을 또 꺼낼 법도 한데, 어느덧 올해 신춘문예도 이제 불과 두어달 남짓밖에 안 남은 시기인 까닭에 오늘은 그의 데뷔작이요 등단작인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한 편을 올려놓습니다.
편안한 주말 저녁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세계불꽃축제 카운트다운이 방금 막 끝난 시각에) ;
가구의 힘
- 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가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