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황지우, '뼈아픈 후회' (슬픔과 죽음에 관한 예술, 극복하기 위한 나날들)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10. 5. 10:53

 
 
 
[베껴쓰고 다시읽기] 슬픔과 죽음에 관한 예술, 극복하기 위한 나날들 (황지우, 뼈아픈 후회) : 
  
 
시월, 사월만큼 잔인한 하늘이 드높게 펼쳐진 하루는 슬픔 가득한 나날들의 시작을 알릴 뿐입니다. 슬픔이란 감정은 때때금 잊혀질 법하면 다시 찾아오곤 한 익숙함이기에 이토록 담담한 채 받아들일만도 해서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을 보면서 '슬픔과 죽음에 관한 예술'을 무척 오랫동안이나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과연 예술의 정수가 슬픔과 죽음 뿐이라면,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은 한없이 불행하고 어둡기만 한 삶의 단면 그 자체일 뿐이겠습니다.
과연 그럴까? 아니면 안 될까? 하는 회의감에 젖은 채 보낸 세월들도 무상히 무덤덤히 스쳐 지나갈 뿐인 나날들일 것 같습니다. 
사월을 잔인한다고 말한 Eliot가 쓴 '전통과 개인적 재능 Tradition and Individual Talent'라는 글을 읽던 시절이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아주 오랜 옛날 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인생의 어느 한 토막은 반드시 행복할 것이라 믿어온 시절들이기도 했어서 오늘은 유난히 그 청춘의 희망들이 그립기만 합니다. 
눈부시게 맑기만 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은 하늘, 눈부시게 그리운 사람들을 추억하면서 가슴 벅찬 회한에 잠길만도 한 하루입니다. 오늘은 황지우의 예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인 '뼈아픈 후회'를 또 꺼내 읽습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도 나온, 더 지난 날에는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처음 접하게 된 그의 복귀작이요 소월시문학상이라는 '그랜드슬램'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 작품이었죠...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다시 맞는 시월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의미있고 소중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주는 바람뿐 
 
 
   * 1994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