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김명인 vs. 정호승, 1973년 신춘문예의 추억 (김명인, 출항제) :
추석 이후로 처음 아침인사를 드려요, 이제 벌써 올해 신춘문예는 "D-61" 즉 딱 두 달만이 남았습니다. 한햇동안 치열히 준비해온 습작들을 벼르고 또 마지막 퇴고를 시작할 즈음이기도 합니다.
한때는 '반시' 동인으로도 굵고 긴 나이테를 새긴 두 시인은 1973년의 한 신춘문예에서 본심의 경쟁상대로 맞붙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본심에서 겨룰만한 실력은 이미 출중한 두 수준인 까닭에 나머지 한 명 역시 다른 지면을 통해 등단을 하게 됐습니다. 참고로, 전 이 후자의 '서울의 예수'를 굉장히 좋아하던 한 팬이었고요.)
그 재미있는 일화를 담고 있는 당선작 한 편, 오늘의 첫 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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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제
김명인
겨울의 부두에서 떠난다.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출항제,
부두의 창고 어둑한 그늘에 묻혀 남몰래 우는
내 목숨같던 애인이여.
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지난 봄 갈 할것없이 우리들은 성실했다.
어두운 밤길을 걸어
맨 몸으로 떠나는 날의 새벽,
눈 내리는 세계.
우리들의 항해일지 속 뜨거운 체험으로 끼워 넣으면
불손했고 쓰라렸던 사람을 덮는다.
감동도 없이 붙들어 지킬 신념도 없이
한 때 깊이 빠져가던 우리들의 탐닉,
일상의 식탁과 우울한 밤의 비비적거림이
한갖 구설의 불티처럼 꺼져가고 있다.
이제는 당당하게 떠나리라,
아, 실어 올린 전생애는 제 나이만큼 선창속에서 보채고
흰 가슴에 사나운 물빛을 겨들고
먼 바다로 달려가는 무서운 시간들.
내 의식의 깊이를 횡단해가는
알 수 없는 설레임도 들리고 있다.
차가운 눈발의 동행속에서
하얗게 서려오던 유년의 숲,
꺾어진 꽃대궁을 끌어안고
그 때 눈물로 다스리던 가슴이여.
북풍처럼 사납게 몰려와서
목숨의 한 끝을 쪼아대는 이웃의 이목속에서 피흘리고
문득 생사의 늪에 앙상한 채 버려지던 지난 날,
마지막 한 방울의
숨어 있던 야성의 피가 깡깡 굳은 풍토병을 적시고
한 세대의 사슬을 의롭게 풀어내던 것을,
질기고 칙칙한 동면을 몰아세우고
우리들은 깊이 잠든 식솔들을 마저 깨웠다.
불면으로 지새우며 밤새껏 항해도를 뒤적이며
아, 버려진 모든 목소리를 새롭게 걸러내며
내 울음이 시대의 물목을 지켜서고.
이윽고 여명속에 떨어지는 아득한 별빛,
우리들은 마침내 물빛 푸른 어장을 찾아내었다.
풀려나는 긴장으로 또한번 감기는 눈꺼풀 속을
파고드는 새벽잠을 털어내고
성실한 두 팔로 기어오르는 불안을 뿌리칠 때,
우리들은 순수한 믿음의 항해 속
차고 맑은 파도처럼 떠도는 저 보이지 않는 역사의
새로운 부활을 감시한다.
끈끈한 적의를 안개처럼 피워올리며
난파의 갯벌을 휩쓸며 바람은
한 때 우리들이 열던 출항의 부두로 내리 몰지만
허나, 굳센 믿음의 밧줄을 이어 잡으며
목숨의 한 끝을 건져내는 강인한 힘,
우리들은 불의 힘에 온 몸을 태운다.
아직도 몰아치는 눈보라에 하염없이 쓰러지며
이마 위에 솟는 피만큼 검붉게
흉중을 헹궈내는 식솔이여,
이제는 내 돗폭의 그늘에 마저 숨어라.
신선한 믿음도 밑바닥이 보이잖게
금린 밝게 떠도는 물빛, 아침의
아아, 무한한 폐활량.
우리들은 태어나지 않은 역사의 새로운 잉태속으로 떠난다.
온 핏속에 또다시 떠도는 체험의
오오, 무수히 용서하라, 울면서 지켜보는 시대여.
비로소 우리는 오랜 정박의 닻을 올리고
순풍을 비는 출항제,
겨울의 부두에서 떠나고 있다.
#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