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십년전의 당선작을 꺼내며 (이병국, 가난한 오늘) :
"통념을 깨는 상징을 찾아라, 감각의 명증성을 보여라, 생명의 도약에 공감하라, 세계의 찰나를 경이로써 보여주라." (심사평 중에서, 장석주/장석남)
벌써 10년전입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평은 현대시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아주 간명히 드러냅니다.
또 이들 각각은 올해 또 앞으로의 신춘문예 역시 이 '그라운드 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임도 함께 시사하는 대목이겠습니다.
과거와의 결별과 극복, 새로운 단어를 정의하는 인식, 미래를 향한 포부와 전망, 디테일에 능통한 작법의 수려한 정도 등은 아마도 평생을 갈고 닦아야 하는 모든 시인들의 숙명이자 숙제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이제 불과 두 달만을 남겨놓은 올해 신춘문예입니다.
연휴를 끝으로 해 다시금 정진과 건필을 당부드릴 시간이기도 해서, 십년전의 일기 대신에 그 당선작을 꺼내놓습니다. ;
가난한 오늘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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