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담담한 어조, 치열한 독백 (임동확, 섬진강의 돌) :
섬진강의 돌
한 연대의 멱살을 거머쥔 채 흐르는 강물로 흐르지 않는 풍경을 적시며 지금 섬진강은 골고루 노을 빛으로 깨어나고 있다.
사랑하는 정아, 저 징검다리 건너 몇구비 물목을 지나 희고 둥근 조약돌들이 모래 무지 처럼 살아 있다. 그리하여, 하류에서 상류까지 물장구치며 파닥인다, 뛰쳐오른다,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균형을 취하며 정확히 목표물에 내려 앉는다. 바로 이게 사랑의 시작이다. 그런대로 모난데 없이 안정된 형상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람과 함께 떠 다녔으며, 또 얼마나 수고로운 인욕과 침묵이 필요했던가 물으며 돌을 집는다.
사랑은 늘 그런 아픔과 그리움을 한 없이 낮은 곳으로 이동시키는것. 잊지 말자, 한 인간이 태어나 죽기까지, 우린 저 어둠 속에 박힌 익명의 별처럼 외로워하고 쓸쓸해 하며 더 기다려야 한다.
끝도 시작도 불투명한 이 시대의 싸움처럼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채 묵묵히 봄 강 언덕에 자운영을 띄우며 첫아기 처럼 예쁜 조약돌 하나 내게 안겨주는 강변을 따라 흐르며 너를 가만히 불러본다.
정아, 이제 세상을 향해 보채지 말자. 제 임자를 기다리다 끝내 풍덩, 물살 센 강물 속으로 다시 빠져드는 돌이거나, 혹은 정에 목마른 신의 손바닥 체온을 받아 남빛 물망초로 이 지상에 또 다시 소생하는 것 모두 하늘과 세월의 뜻인 것. 우린 저 물바람 속의 저녁 안개 처럼 망가지며 아름다워지는 법을 배워가야 할는지 모르겠다. 마치 물때 썰때 마다 강물은 새로운 태양을 되돌려 주 듯, 우리는, 바위 같은 미움의 덩어리를 조약돌로 다듬고, 모래알 같은 기쁨의 알갱이로 일어서는 조국을 위해 헌신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섬진강은 물 흐르는 소리만 남기고 일제히 숨을 고루며 나뭇가지 위의 새처럼 잠들고 있다.
# 임동확, 운주사 가는 길 (문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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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눈'이 한반도를 관통하기로 한 새벽, 이른 잠에서 깨 몇 줄의 시편을 찾아 읽습니다.
예전에 김현 선생이 쓴 <행복한 책읽기>를 읽던 추억이 있는데, 그 책에서 소개했었던 두 명의 시인들 중 임동확 시인이 먼저 생각났어요. 개인적으로는, 인터넷을 LAN으로 연결해 하루종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던 첫 해인 1998년의 중앙일보 메인화면에서 뜻하지 않게 조우한 그의 '지상의 가을날'이라는 시를 읽던 반가움이 크게 앞서기도 했고 또 시집의 제목 하나만으로 화순에 있는 운주사를 몇 번이나 찾았던 발걸음의 경험들도 있고 해서요. (사실 앞의 책에서 소개한 주제는 '오월의 형상화'였는데, 지금은 차분한 서정시가 더 긴요한 시간이라 이제 더는 소개조차도 힘들 '섬진강에서'를 대신해 그의 세번째 시집에 실렸던 '섬진강의 돌'을 꺼냈습니다.)
오래된 시편들의 가장 큰 미덕은 무슨 각을 잡고 시를 분석, 해석할 필요가 그리 없다는 점이겠죠. 그래서 생략합니다.
어제는 바람이 많이 불었고, 지금은 비가 내리는 중입니다. ;
(시인의 산문, 인용)
"시는 단연 정치와 종교적 세계와는 상극의 위치에 놓여 있다. 아니 그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 그만의 고유한 시의 길이 있다. 그래서 시는 결정적으로 통속적이지도 신성하지도 않다. 또한 현실에 붙들여 있으되 늘 현실을 배반하고 초월을 꿈꾸되 결코 초월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차라리 지옥과 천상계의 중간 지점에 존재한다는 연옥적 영혼을 소유한 자다. 만일 죄받는 중생이 보리도(菩提道)에 이르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던 지장경적(地 經的) 세계관을 지닌 자들이다.
나는 그걸 신념으로 지지한다. 달콤하지만 최소한 시에 있어 관념의 극한은 현실의 절실성만큼 금기의 대상이고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행여 그 어느 쪽에라도 기울게 되는 순간 시는 사라지고, 대신 인간을 억압하는 ‘유령의 언어’ ‘죽음의 말’이 어느덧 세상을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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