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김언, "백지에게" (2021년 제29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단테, 정독 2023. 8. 2. 14:43

 
 
 
2021년 제29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 
김언, 백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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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문화재단 - 21세기 문학의 창

예심에서 선정된 9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본심에서 1, 2차 심사를 통해 김승희의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김언의 『백지에게』, 김현의 『호시절』, 백은선의 『도움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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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희의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 김언의 "백지에게", 김현의 "호시절", 백은선의 "도움 받는 기분"이 최종심 대상작으로 올랐다. 단어나 문장을 연쇄적으로 나열하여 자신만의 어휘사전, 단어사전을 만들고 또한 단지 사전을 쓸 뿐만 아니라 문장을 뒤집고 사유하며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끈질기게 드러낸 "백지에게"가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심사평 중에) 
 
   최근 10년 동안 대산문학상에서 수상을 한 시인들 중 무려 아홉 명이 50대의 나이였습니다. (유일한 40대가 오은 시인이었네요.) 재작년에 일곱번째 시집인 "백지에게"로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김언 시인 역시 올해를 기점으로 해 50대의 대열에 마저 합류할 텐데요, 부산대 산업공학과 출신으로는 실로 보기 드문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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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에게 
 
 
 
   백지가 되려고 너를 만났다. 백지가 되어서 너를 만나고 백지처럼 잊었다. 너를 잊으려고 백지답게 살았다. 백지가 저기 있다. 백지는 여기도 있다. 백지는 어디에나 있는 백지. 그런 백지가 되자고 살고 있는 백지는 백지답게 할 말이 없다. 대체로 없고 한 번씩 있다. 백지가 있다. 백지에서 나오는 말들. 백지에서 나와 백지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말들. 도무지 백지가 될 수 없는 말들이 한마디로 그치지 않을 때 두 마디로도 그치지 않고 모자랄 때 모자란 만큼 잠식하는 백지의 운동은 백지를 갉아먹는다. 백지를 지워 나간다. 백지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백지의 운동은 점점 더 백지를 떠난다. 백지가 되지 않으려고 너를 만난 것 같다. 백지가 되지 않아서 너를 만난 것 같기도 하다. 백지는 충분한데 백지는 불충분한 사람을 부른다 백지는 깨끗한데 백지처럼 깨끗하지 못한 사람을 다시 부른다. 백지는 청소한다. 백지에 낀 백지의 생각을. 백지는 도발한다. 백지처럼 잠든 백지의 짐승을. 으르렁대는 소리도 으르렁대다가 눈빛만 내보내는 소리도 백지는 다 담아 준다. 백지가 아니면 담기지 않는 소리를 백지가 담으니까 이렇게도 어수선하고 시끄럽고 그걸 다 모아서 백지는 입을 다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백지 한 장이 있다. 너무 소란스러운 가운데 백지 한 장을 찾는다. 백지가 어디로 갔을까? 비어 있다고 백지는 아니다. 백지로 차 있다고 해서 백지는 아니다. 백지는 백지답게 불쑥 튀어나온다. 백지였다ㅡㄴㄴ 생각을 잠시 잊게 만드는 백지 앞에서 백지를 쓴다. 백지라는 글자를 쓰고 또 잊는다. 
 
 
 
   # 김언, 백지에게 (민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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