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이제니,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는 ‘구도와 헌신’)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6. 27. 13:59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이제니



   멀리 성당의 첨탑에서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 들려온다. 열린 창 너머로 어스름 저녁 빛 새어 들어오고, 마룻바닥 위로 어른거리는 빛, 움직이면서 원래의 형상을 벗어나려는 빛이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옛날의 빛이 있다. 사제는 한 그릇의 간소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자리로 물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화면은 다시 정지된다. 일평생 봉쇄 수도원의 좁고 어두운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 기도에만 헌신하는 삶, 너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기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 묻는다. 화면은 다시 이어진다. 너는 책상으로 가 앉는다. 맞은편에는 비어 있는 의지, 비어 있음으로 가득한 의자, 책상 위에는 먼 나라에서 보내온 엽서가 놓여 있다. 엽서는 북반구 소도시의 풍광 사진을 담은 것으로 단단한 얼음을 도려낸 듯한 작은 호수가 펼쳐져 있다. 한때의 죽음과도 같은..... 호숫가에는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어딘가로 가려는  동시에 어딘가에 멈추어 서 있다. 멈추어 있는  패로 움직이고 있는 자전거 바퀴의 빛살이 아득히 눈부시다. 언젠가 너를 눈멀게 했던 호수의 빛,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남몰래 몸을 던지려 했던 깊고 쓸쓸한 물결의, 엽서 곁에는 작고 검은 돌이 몇 개 놓여 있다. 검은 돌....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는 작은 돌, 돌의 표면 위로 무언가 흘러가고.... 돌연 가슴을 두드리는 슬픔이 지나가고...... 돌은 다시 발견된다. 돌은 그제야 제자리에 놓인다. 발견되는 돌 이전에는 발생한 눈이 있었고, 눈. 바라보는 눈. 바라보면서 알아차리는 눈. 알아차리면서 흘러가는 눈. 흘러가면서 머무르는 눈. 머무르면서 지워지는 눈. 지워지면서 다시 되새기는 눈. 너는 엽서의 뒷장을 펼쳐 읽는다. 끝없는 설원의 가장자리로부터 한 사람이 베일 듯 걸어 나온다. 얼음의 꽃으로부터 향기를 간직하려던 사람이여, 닿을 수 없는 국경 너머를 향해 뿔피리를 불던 먼 생의 사람이여. 너는 이미 죽은 스승의 전생의 어머니이다. 몇 겁의 세월을 지나 이름 없는 여인이 낳은 구슬픈 눈을 가진 어린 린포체이다. 순간...... 마룻바닥 위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의 겪지 못한 형국을 한눈에 다 바라볼 수 있다는 기이한 착각 속에 빠져든 채로.... 맞은편은 여전히 비어 있다. 비어 있음으로 가득히 비어 있다. 의자에 앉은 너는 끝없는  설원 위를 끝없이 걷는다. 고행이라도 하듯이, 앞서 걸어가는 네 자신의 옷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가듯이, 정지된 화면은 다시 재생된다. 기도를 마친 사제는 책상으로 옮겨 앉아 먼 나라의 슬프고 아픈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빛이 먼지를 지우고 있습니다. 밤이 어둡을 돕고 있습니다. 사이..... 푹푹 눈밭에 빠지는 발소리가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왔기에. 너는 의자에 앉은 채로 걸음을 멈춘다. 눈을 들어 옆을 바라보았을 때, 어느새 작고 어린 겨울 짐승이 네 곁을 따라 걷고 있었고 너와 어린 짐승은 각자의 생각에 잠겨 각자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것은 언젠가 전해 들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와도 같아서. 네가 바라보는 거울 속에서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볼 수 있다는 찰나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로서, 너는 작고 검은 돌 위에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한 얼굴을 발견한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무수히 떠오르는 몸짓들. 빛과 어둠의 경계 위에서 흩날리는 입자와 입자 사이의 흐느낌 속에서, 잊고 있었던 기억처럼 먼지의 춤이 발생한다. 춤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하염없이 내리는 누이 있었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 이전에는 하염없이 덮이는 땅이 있었고, 하염없이 덮이는 땅 이전에는 하염없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몸이 있었고...... 너는 멈추어 있는 채로 걸어가는 그 모든 사물의 표정과 목소리를 너 자신의 얼굴인 듯 읽어 내려간다. 사이..... 먼 나라의 사제는 온몸으로 세계의 울음을 듣는 사람이 되어 이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가고 있었고, 어느덧 너는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설원의 모서리에 도착해 있었으므로 이제 그만 작별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함께 걷던 작고 어린 겨울 짐승은 어느 곁에 사라지고 없었고 오직 너 혼자만이, 너 자신과 함께. 둘인 동시에 하나인 채로. 하나인 동시에 둘인 채로, 먼 길을 오래오래 홀로 함께 걸어가고 있었으므로 걷고 걸어도 가닿지 못하는 설원의 빛 너머로부터. 누군가 멀리서 내내 당신을 돕고 있습니다.. 춥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들려오듯 문득 서럽고 드넓게 울려오는 네 마음속 한목소리가 있어. 너는 먼 곳의 얼굴 없는 사제를 네 영혼의 친척으로 여기는 것이다.



   - 현대문학 8월 (현대문학,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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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는 ‘구도와 헌신’ 

 

 

  
   춤을 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노와 슬픔을 한데 모아 발끝과 손끝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리듬을 타고 가느라한 색실 같은 게 흘러나오면 그 실오라기를 부여쥔 채 하염없이 떠도는 공간, 그 속에서 찰나의 시간을 새겨넣는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춤을 노래한다는 건 또 무얼까요.

   분노와 슬픔이 형형색색으로 수놓기 시작하는 그 시간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흘러서 더는 보지 못할 일들에 관한 추억을 미리 저장해놓는 일 따위.

   미리 써놓는다는 일은 때때로 시덥지 못한 일이기 십상인 노릇입니다.

   춤을 처음 발견할 무렵, 시인은 어쩌면 ‘분노와 슬픔’보다도 ‘구도와 헌신’을 더 먼저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유폐한 기도, 설원 위를 걷는 짐슴의 그것처럼 울음을 듣는 사람이 되어 어린 짐승을 돌보고 편지를 쓰는 일로 스스로를 규정하곤 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가끔씩 끓어오르는 분노를, 심연을 알 수 없을 슬픔을 빚어 꺼내는 눈물과도 같을 일이라고 여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그것들을 부여잡고 또 다독이면서 거리를 둔 채 그저 밋밋하게 담담하게 말할 줄 아는 게 또 시인의 태도라고도 여겼던 시절이 있습니다.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는 ‘구도와 헌신’.

   시인이 춤에서 처음 발견내해고자 한 그 무언가가 사제를 친척처럼 여기는 영혼으로, 멀리서 누군가를 돕는 존재로도 각인되려면 또 어떤 수행을 묵묵히 더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처럼도 들립니다.

   이 시를 읽는 마음가짐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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