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습작

절골계곡에서

단테, 연초록, 정독... 그리고, '종로학파' 2024. 8. 19. 14:39

    
   
   
   절골계곡에서  
   - 망각에 관하여 
  
  
  

   보세요,   

   발가락에 잡힌 물집을 계곡에 담그면 이내 쓰리고 얇은 살갗에 느껴지는 세찬 물살을 기억할 적 많았습니다 세상살이를 겪다 생긴 상처는 그만한 무게의 슬픔과 그만한 속도의 망각을 동시에 경험하는 모양입니다

 

   투명한 석영의 빛이 햇빛에 산란될 만큼 더디게 진행하는 오후는 제 아무리 애를 써도 지우기 힘든 무늬를 갖습니다 무늬의 모양에 따라 그것들이 체제와 희망과 이별과 그리움을 차곡히 챙기는 시간인가도 모르겠습니다 

 

   마른장마 탓에 빛을 잃고 먼지가 희뿌연 돌들 틈에선 이따금 휘파람 소리가 들릴 적 있는데요 누군가의 노래를 듣다 보면 저마다 꿈꾸게 되는 사연들이 하나둘 등장하게 되고 함께 춤추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보세요, 

   주왕산 야트막한 절벽이 가을처럼 푸른 하늘 끝에 매달린 구름을 닮고 얼굴을 그을리게 만듭니다 땡볕 아래서 땀을 흘리다 보면 주산지에 둥지를 튼 버드나무 잎새들에게 고고한 연륜을 배울까도 사뭇 궁금하였습니다 

 

   커다란 바위들 틈에서 천천히 흐르는 계곡 물을 따라 다시 발을 담그면 이내 쓰리고 흔들리던 발끝에도 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슬픔에 헤매고 망각을 방황할 겨를이 없었나 봅니다 

  

   보세요, 

   이렇게나 개운한 웃음으로 다시 쳐다보는 얼굴을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인연의 첫인상,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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