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필사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단테, 연초록, 정독, 그리고 종로학파 2024. 6. 29. 10:08

  

 

 

   시인의 말 

 

 

   언젠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내 앞에는 두가지 시의 길이 주어져 있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 나는 이 두 길을 모두 가보기로 한다." 첫 시집 이후 대략 육칠년 동안 두 작업은 완전히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전자의 결과물이 "초자연적 3D 프린팅"이고 후자의 결과물이 "하얀 사슴 연못"이다. (중략) 

   이제 앞서 말한 두 길을 모두 가본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시의 길을 두가지로 한정한 것도 좀 우습군. 길 아닌 곳도 걸어가다보면 길이 되어 있겠지.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갈 것이다. 계속. 

 

 

   2023년 입동 

   황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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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상태 

      

   

   꿈에 백발이 되었다 

   머릿속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머리 위엔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머릿속이 새하얘서 

   머릿속엔 아직 눈이 내리나보다 

   눈보라가 몰아쳐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나보다 

   보이지 않으면 좋다 

   아무 데로나 가도 상관없으니까 보이지 않으면 

   찍힌 발자국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이제 나는 다른 땅 위에 서 있다 

   거기서 뒤돌아본 강 위론 아직 눈이 내리는 듯하고 

   이제 저기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추위 속에 견고해진다 

   폭설은 백지에 가깝고 

   가끔 눈부시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백지를 본다 

   백지를 보여준다 

   내가 쓴 거라고 

   내가 쓴 백지가 

   이토록 환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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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의 속삭임 

 

 

   시베리아의 야쿠트인들은 

   입김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공중에서 얼어붙는 소리를 

   별들의 속삭임이라고 부른다 

 

   별들의 속삭임을 들어본 건 아마 

   야쿠트인들이 처음이었을 거다 

   그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소리에 

   별들의 속삭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 없었을 테니까 

 

   너무 춥지 않았더라면 

   너무 추워서 하늘을 날던 새들이 나는 도중 얼어 

   땅에 쿵, 

   얼음덩어리로 떨어질 정도가 아니었더라면 

   별들은 속삭이지도 않았을 거다 

 

   별들의 속삭임은 가혹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가혹한 lo-fi 사운드 

   그것은 가청주파수 대역의 소리를 원음에 가깝게 재생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아름다움이고 

 

   별들의 속삭임을 듣는 자는 시베리아 아닌 그 어디서라도 

   하늘의 입김이 얼어붙는 소리를 듣는다 

   추운 날 밖에서 누군가와 나눠 낀 이어폰에서도 별들이 얼어 

   사탕처럼 깨지며 흩날리는 

   가루 소리를 듣고 

 

   머리가 당장 깨져버릴 것처럼 맑을 때 

   머리가 벌써 깨져버린 것처럼 맑을 때 

   그런 맑고 추운 밤이면 사방 어디서라도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 들려온다 

   무심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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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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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모 :: 

 

   현역들 중 가히 '1군'에 해당될만한 시인 중 한 명인 황유원이다 

   시간 관계상 이번에는 몇 편만 필사를 해보았는데,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