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습작

후회할 일들 (퇴고)

단테, 정독 2024. 6. 6. 10:46

   
   

   후회할 일들 

   
    
  
   세찬 풍파 속에서도 말발굽을 잘만 지켜낸다면 길을 잃지 않을 거라는 믿음 따위로 그 먼 행군을 마다하지 않던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잃었던 건 말발굽이 아니라 그들의 처자식임을 과연 몰랐겠는가 영문도 모를 전쟁터에서 사지가 잘려나간 채 죽어간 동료들을 애도하며 매일밤 그들이 태운 송장 냄새의 역겨움이 하늘을 찌르고 검은 하늘 주위로 까마귀 떼가 한참 날아오를 때 어쩌면 그 풍파를 실감했는지 모른다 
 
   더 이상 죽지 말자 
   더는 죽어선 안 된다 
   하면서도 또 죽어간 
   동료들을 위하여 
 
   모진 눈보라를 얼굴로 마주한 행렬에서 혹 어떤 남녀는 눈이 마주쳤는지 모른다 그 먼 행군길에서 손을 잡아줄 따스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면 어찌 마다할 리 있겠는가 하지만 늘 바람 같은 감정이 일고 하룻밤의 연정은 이내 사그라들고 두 남녀는 늘 이별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마저 길을 나서야만 했다 그걸 결별의 축복으로 찬양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고 때때로 한 남자 또는 한 여자가 국경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전해듣고야 만다 
 
   더 이상 슬퍼하자 말자 
   더는 슬퍼할 겨를이 없다 
   하면서도 또 떠나간 
   연인들을 위하여 
 
   그토록 애타게 갈구한 기다림마저 저렇듯 큰 눈에 뒤덮인 채 기억이 무덤으로 저물 무렵 시린 발걸음들이 지친 기색이 역력함도 잊은 채 맨 우두머리에 선 용자들은 기어코 또 다시 국경을 넘었다 지금부터는 서울특별시입니다 가양대교 밑에서 두 다리를 쫘악 벌린 채 한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경찰들이 휘슬을 연신 불어대며 그를 체포하려는 순간에도 석양을 등진 열차가 쏜살같이 한강을 건너는 풍경은 가히 서사적이군, 하며 평론가들의 호평이 쏟아지고 
 
   초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던 한 여자가 물었다 그게 시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이따위로 쓸 거면 차라리 노래를 듣는 게 낫겠어 하며 눈을 흘기는데 몇 번을 호탕한 웃음으로 넘기곤 했어도 어째 오늘 밤은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아 애써 못 들은 척하며 화제를 돌려보는데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 하오 
   풍성한 가지와 그늘을 주려 하오 
   
   쏟아지는 햇빛을 담은 나뭇가지들이 곧 다가올 봄을 알리려는 몸짓을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이 처량한 레퀴엠의 말미에도 무언가 한 줄기 그림자가 내비칠 텐데 그걸 기다리며 끝끝내 침묵했던 단어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게 된다면 과연 그 말의 주인은 누구일까도 생각해봤는지 모른다 주인 없는 말들이 요동치고 범람하고 드디어 강둑을 넘쳐 흐른다면 어슬프게 달려온 이 막장 같은 오후에도 서릿발 같은 웃음이 펼쳐지고 그 살기등등한 눈빛에 모두들 침묵하게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다시 이는 세찬 바람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 헤어진 채 서로 다른 장소를 향해 걷는 두 남녀가 한데 어우러진 저녁의 태양은 여전히 밝고 눈부시고 애처롭게 불타는데 석양이 아닌 달빛 아래서 죽음을 맞이한 그들의 추억은 과연 이대로 잊혀질 것인지 또 누군가에 의해 회자될 영혼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 기억을 위해 몇 문장을 남겨둘 뿐 
 
   더 이상 애쓰지 말라 
   더는 수고로울 필요도 없다 
   하면서도 늘 갈망했던 
   희망이라는 이름의 열차를
   오르게 될 순간을 위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