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신춘문예 '탈락'의 지름길이 된 '낭만'은 무죄다 (박정대, 시) :
때때금 '등단'의 경로에 관해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생깁니다. 글쎄요... 이미 등단한 시인들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정한 형태의 '패턴'이 존재해왔음은 역대 당선작들을 봐도 어렵지 않게 유추가 가능해질 것 같아요. 대표적인 게 오늘의 화두, 즉 '낭만'입니다.
한때는 가장 '낭만파'에 속한다고도 생각해온 박정대 시인은 아시다시피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적이 없었죠. 아마도 그의 화풍이 '미래파' 일색이었던 현 시단과는 그리 잘 어울리지 못하였던 까닭일 것 같습니다. (이럴 때면 우리는 다시 또 각종 문예지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더 공산품마냥 획일화된 전국단위 공모전들의 '패턴'을 슬쩍 비켜서 한층 더 '개성'을 드러낼만한 신작들도 좀 더 자주 나왔으면 제법 풍성해지진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이 정도의 고민은 이제 신춘문예가 아닌 역대 각종 문학상 수상작들을 보면 훨씬 더 뚜렷해집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호령해온 듯한 박준이나 황인찬도 이제니도 안희연도 아직 수상을 못한 국내 최대 상금규모라는 대산문학상의 역대 수상자 목록에는 바로 박정대 시인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으니까요.
날씨가 꽤 차갑습니다. 시월의 첫 일과가 시작될 오늘, 기운차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시
- 박정대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키치라 해도 좋소
무더운 여름밤을 건너가기엔 그 말투가 좋았던 것이오
자정이 넘은 코케인 창가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바라보는 적막한 거리 풍경이 좋았던 것이오
햇빛 씨의 열기가 대낮의 조국을 뜨겁게 달구고 그 열기는 밤이 되어서도 식지 않았소
111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폭염이라 했소
폭탄을 맞은 폐허의 도시처럼 허공에 떠도는 풍문은 흉흉했소
어디를 가도 숨이 가빠오는 숨 막힐듯 뜨거운 열기의 나날이었소
111년 전이면 1907년인데 나의 말투는 1907년의 고독 씨처럼 어느덧 그 시절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오
러브가 무엇이오 나는 모르오
시는 또 무엇이오 나는 모르오
조국이 이토록 뜨거운데 내가 어찌 조국보다 더 뜨거운 시를 쓸 수 있겠소
밤이면 코케인에서 술을 마셨소
창가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는 게 나는 좋았소
그렇게 여름을 지날 수만 있다면
말투야 어떻든 괜찮았던 거요
술을 한잔 마시고 돌아오는 새벽이면 생각했던 거요
나는 줄곧 적막한 새벽의 길을 걸어
거대한 고독의 시간을 횡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꿈꾸는 자들은 언제나 대낮과 제국의 반대편이었고
오롯이 자기 꿈 동지였다는 것을 말이오
검은 말 한 마리 웅크리고 있는 밤이었소
여전히 깊고 어두운 검은 밤이오
*
춤이 없는 혁명은 일으킬 가치가 없는 혁명이오―브이 포 벤데타
미스터 션사인이라 했소 누가 햇빛 씨인지 나도 모르오
한낱 주말 밤에 방송되는 드라마라기엔 대사들이 깊었소
몇몇 깊은 대사를 이곳에 옮길 의도는 없소
다만 그 말투가 투박하고 좋았던 것이오 물론 그게 다였겠지만 말이오
퐁피두센터가 생기기 전 파리의 건물 고도제한은 25미터였소
먼 이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문득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소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파리의 목조 건물 세탁선에 관한 기록을 보았소
그런 여름밤엔 밤새 시를 쓰고 싶었는데 밤에도 열대야는 계속되고 시는 써지지 않았소
조국이 이렇게 뜨거운데 내가 어찌 조국보다 더 뜨거운 시를 쓸 수 있겠소
그리고 슬픔이 시작되었소 몇 날 며칠 폭염과 염천의 하늘이 이어졌소
말을 타고 떠났는지 기차였는지 배를 타고 떠났는지 나는 모르오
어느 날 아침 뉴스를 보다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것은 비보였소 살아생전 한 번도 만난 적도없는 자의 죽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이토록 사람을 황망하고 슬프게 만든다는 사실에 전율했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소 며칠 동안 술만 마셨소
나의 고독은 나의 침묵은 나의 음주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소
그래서 고독했고 그래서 침묵했고 그래서 음주만 했던 것이오
나에겐 불의에 대항할 총이 없었고 허무에 맞설 사랑이 없었고 열대야를 재빠르게 건너갈 서늘한 신념조차 없었던 게요
귀하를 러브하오 그런데 러브는 과연 무엇이오
도대체 이 뜨거운 열기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오
귀하는 또 어디에서 이 뜨거운 밤을 혼자 건너가고 있는 것이오
밤하늘에 보이는 건 그저 깊고 깊은 구름뿐이오
태양탐사선 유진파커호를 보냈다하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서로 연대하는려는 지상의 밤이오
연락하오 귀하는 누구요 안녕
깊은 밤하늘에 그가 있소
* 불란서 고아의 지도 (현대문학,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