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미스터 션샤인의 말투로 말하겠소
키치라 해도 좋소
무더운 여름밤을 건나가기엔 그 말투가 좋았던 것이오
자정이 넘은 코케인 창가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바라보는 적막한 거리 풍경이 좋았던 것이오
햇빛 씨의 열기가 대낮의 조국을 뜨겁게 달구고 그 열기는 밤이 되어서도 식지 않았소
111년 만에 맞아온 최악의 폭염이라 했소
폭탄을 맞은 폐허의 도시처럼 허공에 떠도는 풍문은 흉흉했소
어디를 가도 숨이 가빠오는 숨 막힐듯 뜨거운 열기의 나날이었소
111년 전이면 1907년인데 나의 말투는 1907년의 고독 씨처럼 어느덧 그 시절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것이오
러브가 무엇이오 나는 모르오
시는 또 무엇이오 나는 모르오
조국이 이토록 뜨거운데 내가 어찌 조국보다 더 뜨거운 시를 쓸 수 있겠소
밤이면 코케인에서 술을 마셨소
창가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는 게 나는 좋았소
그렇게 여름을 지날 수만 있다면
말투야 어떻든 괜찮았던 거요
술을 한잔 마시고 돌아오는 새벽이면 생각했던 거요
나는 줄곧 적막한 새벽의 길을 걸어
거대한 고독의 시간을 횡단하고 있었다는 것을
꿈꾸는 자들은 언제나 대낮과 제국의 반대편이었고
오롯이 자기 꿈 동지였다는 것을 말이오
검은 말 한 마리 웅크리고 있는 밤이었소
여전히 깊고 어두운 검은 밤이오
춤이 없는 혁명은 일으킬 가치가 없는 혁명이오-브이 포 벤데타
미스터 션샤인이라 했소 누가 햇빛 씨인지는 나도 모르오
누가 누구의 햇빛이 될 수 있다는 건지도 나는 모르오
한낱 주말 밤에 방송되는 드라마라기엔 대사들이 깊었소
몇몇 깊은 대사를 이곳에 옮길 의도는 없소
다만 그 말투가 투박하고 좋았던 것이오 물론 그게 다였겠지만 말이오
퐁피두센터가 생기기 전 파리의 건물 고도제한은 25미터였소
먼 이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문득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소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파리의 목조 건물 세탁소에 관한 기록도 보았소
그런 여름밤엔 밤새 시를 쓰고 싶었는데 밤에도 열대야는 계속되고 시는 써지지 않았소
조국이 이렇게 뜨거운데 내가 어찌 조국보다 더 뜨거운 시를 쓸 수 있겠소
그리고 슬픔이 시작되었소 몇 날 며칠 폭염과 염천의 하늘이 이어졌소
말을 타고 떠났는지 기차였는지 배를 타고 떠났는지 나는 모르오
어느 날 아침 뉴스를 보다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것은 비보였소 살아생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자의 죽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이토록 사람을 황망하고 슬프게 만든다는 사실에 전율했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소 며칠 동안 술만 마셨소
나의 고독은 나의 침묵은 나의 음주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소
그래서 고독했고 그래서 침묵했고 그래서 음주만 했던 것이오
나에겐 불의에 대항할 총이 없었고 허무에 맞설 사랑이 없었고 열대야를 재빠르게 건너갈 서늘한 신념조차 없었던 게요
귀하를 러브하오 그런데 러브는 과연 무엇이오
도대체 이 뜨거운 열기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오
귀하는 또 어디에서 이 뜨거운 밤을 혼자 건너가고 있는 것이오
밤하늘에 보이는 건 그저 깊고 깊은 그룸뿐이오
태양탐사선 유진파커호를 보냈다 하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서로 연대하려는 지상의 밤이오
연락하오 귀하는 누구요 안녕
깊은 밤하늘에 그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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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대, 불란서 고아의 지도 (현대문학,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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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전위적'인 섬, 격렬비열도에서 외친 혁명적 유머
대한민국 최서단, 격렬비열도라는 낯선 이름만큼이나 더 유명해진 박정대 시인은 현존하는 가장 '전위적'인 시인 중 한 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벌써 그의 나이도 이젠 벌써 쉰여덟이나 되었다는 게 어쩌면 유일한 핸디캡이라고 할만한)
사실 오늘 이 자리에서 소개하고픈 시는 <의기양양 (계속 걷기 위한 삼중주)>였습니다. 지독한 난해함은 둘째치고 무려 시집으로만 오십 페이지에 가까운 이 엄청난 분량의 시 안에서 시인은 짐짓 "전직 천사"를 참칭하며 '혁명적 유머'와 그만의 시론을 유장하게 펼쳐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장함'이란 결코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급진적인 무언가에 더 가까울 것이기에 이를 '전위적'이라 표현하는 게 더욱 적절할 것 같습니다.
"단언컨대 모든 것은 시로부터 온다" (<의기양양> 중에서)
한창 TV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방영될 무렵, 시인은 너스레를 떨며 유친 초이의 말투를 흉내냅니다. 이미 앞에서 소개한 <의기양양>에서 한창 시론을 펼쳤음에도 무언가 또 다른 할 말이 더 남았다는 것인지 시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시>입니다. (실은 같은 제목을 갖는 또 다른 작품을 2021년에 펴낸 최근의 시집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에도 수록한 바 있기도 하죠.)
스스로 "칼 마르크스"를 언급하면서도 대뜸 "키치"를 수용할만큼 그가 갖는 '포스트모던'함에 대한 자격지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의기양양>에서처럼 태연스럽게 사무엘 베케트, 라이프니츠주의자, 가스통 바슐라르, 알베르 카뮈 같은 이름들을 주절댑니다. 그렇다고 또 그들을 추앙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 천연덕스럽게 수백 명의 이름들을 열거한 태도는 어쩌면 그가 그들 중 한 명에 불과하다는 자각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 스스로 이름을 붙인 "코케인"과 "아무르"는 여전히 중요한 상징들입니다. "코케인"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즐거움과 "조국보다 더 뜨거운 시"에의 절망 사이에서 시인의 "고독"은 "투박하고 좋았던 것"을 닮고 싶은 모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슬픔, 죽음, 그리고 고독과 침묵과 음주로 이어지는 일종의 알리바이입니다. "총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서늘한 신념조차 없었던" 시인이 이 지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방식을 (또는 그 속에서의 "아무르"를) 스스로 구가하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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