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조혜은, '여름 불청객' (한증막과 첫 여행)

단정, 2025. 7. 3. 03:10

 

 

 

   여름 불청객 

  

  

   모래에 얼굴을 묻게 되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설렜다
 
   그는 표정이 많은 사람 
   나는 표정이 없는 얼굴로 
   그의 기나긴 표정을 흉내 냈다
 
   휴가나 해변은 어울리지 않아 
   우리는 여덟 시간 동안 바다에 있었다
 
   언제든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단추가 풀어진 그의 검은 셔츠와 단정하게 올라간 옷깃의 반쯤 접어 올린 소매와 체온을 발음하는 목덜미와 
   끝나지 않는 여름의 결연과 절연 
 
   너의 악의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돌아오는 여행의 끝에서는 
   오후는 있거나 없고
 
   끝나지 않는 비 소식이
 
   우리는 꿈에서 만나 
   걷는 것 말고는 
   사랑을 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말고는
 
   쓸 수 없는 무언가가 이뤄져도 
   아무것에도 이를 수 없었지만
 
   그는 도망자처럼 스치듯 
   나에게 귀 기울여주었지
 
   너는 미운데 좋은 사람 
   머물게 하고 싶지만 갔어야 했을 사람 
   무례하게도 선량한 슬픈 사람
 
   그곳은 너의 표정과 비슷했으나 
   결코 이뤄지지 않을 나의 세계
  
   모든 행복은 불안했고 
   묽은 죽을 쑤는 여인처럼 처량했지 
   여름은 더 이상 요약되지 않았다 

 

 

   # 조혜은, 털실로도 어둠을 짤 수 있지 (문학동네, 2025) 

 

 

   ... 

 

 

   한증막과 첫 여행 : 

 

 

   칠월이 되자마자 긴 장마철은 큰 비 대신에 지독한 한증막의 여름밤을 선사해 놓습니다. 

   무더위를 피해 무얼 해볼까 하다가 문득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당장 오늘 오후에 출발을 해 강원도까지 다녀올 예정입니다. 올여름의 첫 여행이에요. (이렇듯 즉흥적이고도 무계획적인 여행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오히려 익숙해졌습니다만) 

   칠월에 소개해드릴 시인으로는 허수경 시인 다음으로 조혜은 시인을 뽑습니다. 가장 최근에 나온 문학동네의 새 시집이기도 하며, 유독 '불행'과 엮인 정서의 끈끈함이 인상적인 탓일 수도 있겠습니다. 

   "모든 행복은 불안했고" 또 이어서 "더 이상 요약되지 않았다"는 여름이기에, 시인의 독백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이른 새벽이지만 힘겨울 정도로 고된 더위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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