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임어지니, '벙커' (요즘 시들의 풍경)

단정, 2025. 6. 30. 02:33

  

  

 

   벙커 

 

 

   집이 무너졌다 미래를 무너트려서 

   

   미래는 오래전 알고 지낸 친구의 이름 같고 우리가 함께 골조 작업했던 주소지 같기도 하지 

 

   고층 아파트 올려다볼 때 그 끝에 노을이 매달려 있는 것은 일종의 착시 효과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고 한다 

 

   믿음이 없어도 무엇이든 믿을 수 있고 

 

   헤어진 당신이 죽은 사람이라 믿는 것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방식 혹은 살아남기 위한, 아무렴 내가 발굴해낸 생존전략인 것이다 

 

   빈 의자 위로 이불 펼치면 미숙한 트라이앵글 

 

   그 아래 작은 아지트가 탄생하고 해 들지 않는 그곳에서 먹고 자고 미래에 관해 생각하기로 한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가 그런 것을 

 

   생각하다 번뜩 무너지면 그건 의자가 넘어져서? 

   이불에 무언가 묻은 자국 가득해서? 

 

   단지 달아올라서 온몸이 붉게 가렵게 

 

   집먼지진드기 알레르기라고 했다 

 

   이게 제일 어려운 건데 침구를 자주 세탁하고 환기도 잦 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거네요 영구적인 치료 같은 건 묻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 빨래방에 간다 

 

   지하에 위치한 빨래방은 이토록 좁은데 거대한 세탁기 

   거대한 건조기 여러 가구의 무수하고 거대한 생활들 돌아가고 있고 

 

   어쩐지 생활이란 건 미래의 잔흔 같아서 

 

   이삿짐 빠진 거실이나 공사 터에 떠도는 먼지, 당신이 남겨두고 간 흔적들, 온몸에 피어오른 붉은 반점의 근원지 같기도 해서 

 

   세탁을 돌린다 다시 쌓아 올리는 마음으로 

   보송해진 기분이 들면 

 

   매일 조금씩 지어지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 임어지니, 202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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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시들의 풍경 : 

 

   

   올해의 첫 전국단위 공모에서 수상작이 된 작품이죠? 이번 <현대문학> 6월호에 실린 임어지니 시인의 등단작입니다. 

   할 말이 비교적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심사평만 인용해볼까 합니다. (기성 문단, 아니 심사위원의 시각을 대변) ;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시의 해상도를 선명하게 만드는 시편, 전개에 있어 세밀한 연결과 비약적인 연결의 완급 조절을 통해 산출하는 호흡도 인상깊었다, 섣불리 진술을 통해 정서를 풀어내기보다 장면으로 경유할 줄 알았으며, 친숙한 장면에서도 낯선 감각을 끌어내는 데 능했다, 여타 응모자들의 작품 대다수가 무표정이나 슬픔의 표정을 고수하는 경향과 다르게 작은 낙관과 희망을 발견하고 있으며..." (심사평 중에, 박상수/양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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