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황지우, '길' (인생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단테, 정독 2023. 12. 9. 04:46

 
 
 
[베껴쓰고 다시읽기] 일생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문지, 1990) 
 
 
   ... 
 
 
   "사람들은 희망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거짓말한다. 나는 폐인이 되고 싶다. 나는 완성하고 싶다." 
   "희망의 대답은 대개 둘 중의 하나다. 즉 길흉 중의 하나이다. 이 삶을 다시 살고 싶다고 후회할 때, 그때는 이미 삶을 상당히 살아버린 뒤이다. 거짓말은 끊을 수 없는 유혹이어서 세상에서 가장 후진 골목 끝에는 대개 점치는 집이 있다. 나는 철학자를 경멸한다. 그러나 어떤 유행가 가수에 대해서는 질투를 느낀다." 
  
   1980년 오월의 기억을 십 년만에야 시집으로 펴낸 황지우 시인이 남긴 말입니다. (이 시집에는 '화엄광주'가 실려 당시의 처참했던 사진들과 그들에 대한 진혼곡이 함께 담기기도 했습니다.) 
   소비에뜨가 몰락한 이후에도 기껏 사진첩 한 권을 펴내기만 했던 그가 느즈막히, 1998년에 비로소 새 시집인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서 자본론이 꽂힌 거실의 책장을 언급했던 게 불과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이라는 세월도 흘렀습니다. (당시에 저는 학교 교지에도 실렸던 '길의 노래 II'를 과연 제대로 복기하고 있었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처연한 일상 속 삶의 모습들은 비굴하기만 합니다.
   누구는 못이룬 사랑에 가슴이 저린 채 잠을 설칠 테고, 또 누구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탄하며 지새는 밤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각자한테 주어진 현실은 그만한 무게감을 갖기에, 각각의 선택 또한 충분히 존중받을만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구태여 다른 말을 더 보탤 재간은 제게도 없어 보입니다. 
 
   임의의 채팅창들과 임의의 대화명들 속에도 엄연히 삶의 모습 또한 건재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거짓말을 늘어놓지 않고 진실함을 추구한다면 또 누군가는 기꺼이 손을 내밀 것으로도 확신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고도 생각해봅니다.
   고독한 무명시인들의 삶 속에도 충분한 위로가 되어줄만한 세상이 과연 도래할까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그래도 겨울이 아직 영하 사십 도까지 떨어지지는 않으리라고, 그래서 다행이라고도 여길만한 마음의 자세는 이미 갖추었나 봅니다.
   
   2023년의 마지막 달력 중 두번째로 맞는 주말이기도 합니다. 12월의 아쉬움처럼 다섯 번의 주말이 있겠고, 그 다음이 2024년의 새 아침입니다.
   밝아올 새해를 맞으려면 온전히 이 달력이 끝나기 전에 한 해의 아쉬움과 회고들을 잘 정리해 마무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생애 두번째의 신춘문예 도전을 기록한 해이기도 하며, 첫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고요.)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시인의 부자였던 시대는 단 한 차례로 온 적 없었습니다. 원래가 시인의 삶은 그렇다고도 생각하기로 합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이 쏟아내는 말들 속에서 어쩌면 인생의 가장 가치가 있을만한 한 구절을 발견해낸다면, 역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할 일이므로 계속 읽어보기로 작정합니다. 
   
   주말입니다. 이른 새벽이지만, 주말이 갖는 편안한 기분은 바깥 공기의 포근함에서도 확연히 느껴집니다.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이상기후 현상 탓에 갈수록 환경문제는 심각히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곤 합니다. 여전히 자본이 먼저 선점한 'ESG'의 화두는 신춘문예 심사대 위에서도 전면적으로 대두하였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편안하고도 행복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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