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D-22] 박준의 11년 전 데뷔시집을 읽는 새벽 :
너무 이른 새벽.
잠버릇이 고약해져서인지 술버릇이 고질병이 된 탓인지 모를 허망함이 문득 떠오를 법한 너무 이른 새벽입니다.
일년 내내 편지를 써온 습관이 있어 모처럼 다시 노트북 앞에 앉습니다. (실은 신춘문예 투고용 습작들을 퇴고하기 위함입니다. 이 글을 쓰면 출근 전까지는 대화창을 못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의 데뷔시집을 모처럼 꺼내듭니다. 벌써 11년의 세월을 넘어선 그 무게감보다는 몇 장마다 되새겨보는 지난 시들의 추억과 그 아름다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려 함이며,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대신하여 왠지 더 끌린 이 시집 중 한 편을 고르려 합니다. 막상 기억을 돌이켜보니 올 한해는 유난스레 이 시집을 퍽 자주 필사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법 유명세를 탄 표제시보다도 '마음 한철'에게 더 마음을 쓴 이유에 대해서도 스스로한테 묻는 새벽입니다.
날씨는 계속 추운 편입니다. 잠시 맡았던 새벽 공기는 맑고 차갑고 깨끗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
마음 한철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