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1994년의 '풍경'과 2023년의 '풍경' 사이 (심보선, 필요한 것들) :
다들 꿈을 찾는 시간에 홀로 현실만을 버티며 헤맨다는 일은 때때로 좀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조용한 독서와 글쓰기가 제격이긴 해도, 구태여 전할 마음이 생기면 편지를 써보곤 하지만 이내 몇 시간째를 허비할 그 일들도 까마득한 꿈속을 헤매는 상대방한테는 그저 남 같은 얘기일 뿐, 동시간대를 함께 걷는 일보다는 훨씬 더 고독할 법한 까닭이기에 그렇습니다.
며칠전에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보면서 대뜸 송기원의 '회복기의 노래'를 다시 한 소절 읊을까도 생각했지만, 여름밤이 아닌 계절에는 이 역시 중언부언이길 반복해 아예 그만두기로 합니다. (이미 몇차례에 걸쳐 소개를 한 적도 있겠고)
대신에 오늘 새벽에 띄워보는 노래는 심보선 시인입니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올해 53세의 이 시인도 사회학도 출신인 데다가 이미 어엿한 대학교수가 된 시대입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마주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등과 같은 싯구들을 남긴 그의 데뷔작 '풍경'은 중국 말로 바람과 볕/빛을 뜻합니다. 즉, 마음에 비치는 것들과 눈에 비치는 것들을 함께 일컫는 말이겠죠...
올해 가을이 미래조차 불투명한 모든 문학도들한테도 한줄기 바람의 빛, 눈에 맺힌 한줄기 이슬처럼 무언가를 던져줄 수 있을만한 불꽃 혹은 가볍고도 편안할만큼 자연스러운 나뭇잎들의 몸짓을 닮아가게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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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들
심보선
나에게는 6일이 필요하다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나날이 필요하다
물론 너의 손이 필요하다
너의 손바닥은 신비의 작은 놀이터이니까
미래의 조각난 부분을 채워 넣을
머나먼 거리가 필요하다
네가 하나의 점이 됐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단 한 발짝 떨어진 셈이니까
수수께끼로 남은 과거가 필요하다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모든 것이 이해되는
단 한 순간이 필요하다
그 한 순간 드넓은 허무와 접한
생각의 기나긴 연안이 필요하다
말들은 우리에게서 달아났다
입맞춤에는 깊은 침묵을
웅덩이에는 짙은 어둠을
남겨둔 채
더 이상 말벗이기를 그친 우리......
간혹 오후는 호우를 뿌렸다
어느 것은 젖었고 어느 것은 죽었고
어느 것은 살았다
그 어느 것도 아니었던 우리......
항상 나중에 오는 발걸음들이 필요하다
오직 나중에 오는 발걸음만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 그것인, 아닌,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인,
모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