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40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
최재원,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민음, 2021)
https://m.blog.naver.com/minumworld/222603402282
해마다 동일한 형식을 취해온 민음사 블로그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유독 이 해의 김수영문학상 발표내용만은 따로 게시해놓지 않은 바 있었습니다.
시집의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지만, 그만큼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도 있습니다. (제법 자극적일 수도 있는만큼 별도로 "19금" 사인을 넣어둡니다.)
"모든 것들이 언어였습니다. 말이 아닌 것들도 언어였습니다. 언어가 꼭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한 언어로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꼭 이해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헤맴의 궤적을 통해서도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면 수상소감 중)
"민족사관고를 졸업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명문 프린스턴대에서 물리학과 시각예술을 공부했다. 고3 때 수학에 빠진 게 물리학을 선택한 계기였다. 대학에서 원하던 전공을 공부했으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했다." (인터뷰 기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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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다. 끝이 여엉 하고 뭉개진다. 눈에도 웃음. 입에도, 말에도 묻어나는 웃음. 연습한 걸까? 그와 자고 싶은 건 아니다. 자라면 못 잘 것은 없겠지만 어떻게 생겼든 웬만하면 그의 자지를 굳이, 딱히, 보고 싶지는 않다. 다 벗더라도 거기만은 가리라고 하고 싶다. 아니, 천을 휘감긴다든가, 맥퀸이 만들던 맥퀸이나 베르사체가 만들던 베르사체 같은 것을 입히고, 아니, 아니야, 그냥 티셔츠, 보풀이라든가, 올이 보이지 않는, 그런 티셔츠를 입히고, 아니야, 옷이야 상관없겠지.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 구겨진 옷이라도, 흉한 밴드 처리가 되어 있는 운동복이라도, 드러난 손목, 발목, 거기에 감긴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완벽함을 얻게 될 것이다. 구불구불 대는 밴드와 거기에 박음질된 실, 살에 눌어붙는 밴드의 압박, 이런 것들을 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붙어 있는 먼지나 솜털 같은 것들도 마치 그려 넣은 것처럼 의도를 얻게 될 것이다. 너의 눈썹은 빛으로 그려져 있다. 너의 눈은 아직 결정하기 전의 유리, 입술과 입술이 아닌 것의 그 연한 경계, 가장 확신 가득하며 초조한 피어나는 튤립 같은 입술. 그러나 너는 너무 가깝다. 내가 니가 있는 곳으로 온 것인지, 니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온 것인지, 그의 입술이 열리고 거기서 나온 소리의 진동이 내 귀의 고막을 울리는 것부터, 이미 잘못된 것이다. 이미 너는 너무 가깝다. 귀에 닿는 너의 숨소리가 불결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나 알아요?
그럼요. 알죠.
아 씨발. 밖으로 생각했나 보다. 안다고? 뭘? 니가 뭘 아는데?
누나, 왜 욕을 하고 그래……. 밥 먹었어요?
너와 먹고 싶지도 자고 싶지도 않다. 나는 너를 박제하고 싶다. 약품 처리된, 내장이 없는, 까맣게 구슬이 되어 버린 눈동자, 그런 박제 말고 너의 가장, 가장, 표면에 있는 것들이 너의 가장 아득한 곳을 담을 수 있도록, 가장 표면에 있는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숨도, 생명도, 심지어 내장이라 할지라도. 너만은 시간의 흐름에서 구해 주고 싶다. 그것은 박제와 가깝지만 박제는 아니다. 그것은 어떤 흔들림의 보장, 니가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서 있을 자유, 니가 끝없이 스스로에게 빠져들 자유, 끝없이 자신을 소모할 수 있을 힘.
그가 손을 뻗는다. 나는 움츠린다.
그가 실없는 소리를 한다. 그건 음악 같은 소리다. 오직 그의 입술에서 나온 소리의 진동, 진동과 진동의 사이, 그 템포, 높낮이, 쉼표만이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그는 의미를 밟고 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걷는 곳마다 의미가 피어나는 사람인 것이다. 아. 어떻게 그를 가지고 싶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사정해야 한다는 강박이 어디엔가 있다. 사정은 끝까지 피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빌드업만 하다가는 아마 뒈져 버리겠지. 잠을 재우지 않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조, 조금만 뒤로 가 줄래?
나는 아득해질 대로 아득해져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싶어진다. 그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뜯어보고 싶은 마음과 구석구석 핥고 싶은 마음이, 그가 너무 입체적이라는 사실이. 그는 바람이 빠진 것처럼, 조명이 꺼진 것처럼. 나는 자꾸 역겨워진다. 역겨워하는 내가 역겹고 자꾸 구토할 것 같다.
나랑 잘래?
누가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말했다면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말했다면 그것은 덕지덕지 더러운 말이 되어 부스러기를 잔뜩 남긴 채 바닥에 부서져 있을 것이다. 나는 내려다보기가 두려웠다. 내가 사정하지 못할 것은 뻔했고, 나는 그가 사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허락되지 않아. 나는 그의 손을 뒤로 묶고 그저 그가 찍어내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그의 목이 앞으로 떨어졌다 귀찮다는 듯 뒤로 젖혀지는 것을, 그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그의 이마에 삼각형으로 떨어지던 해가 점점 늘어지며 긴 삼각형이 코에 음영을 만들고, 얼굴을 붉게 타오르게 만드는 것을, 그가 뱉어 내는 소리의 간격과 빠르기를, 그의 예정된 종류의 아름다움을 즐길 것이었다. 그의 아름다움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운명처럼 견고한 것, 닿는 모든 것이 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이미 예정된 것.
# 최재원,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민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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