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제3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
이기리,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민음, 2020)
https://m.blog.naver.com/minumworld/222146681447
"단어 뜻대로라면 일종의 ‘문학장’에 등장한 사람은 누구나 등단한 것이지만, 실제 단어의 쓰임새는 다르다. 신춘문예 등 일정한 제도 절차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등단’했다는 표현이 쓰인다. (중략) 위계 만들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느 신문사, 어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지에 따라 그 안에서도 급은 나누어진다." (배용진, <뉴스페이퍼> 2020)
“등단·비등단을 칼같이 가르는 등단 제도도 모두 남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열등감 문화의 소산이다” (황현산, <한겨레> 2016)
최초로 비등단 작가한테 김수영문학상이 주어진 2020년 역시 '학교폭력'이라는 날카로운 주제를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낸 바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시절에 정호승 시인의 '너에게'를 읽고 시를 쓰기로 결심했지만, 거듭된 낙방 속에 마지막 응모라는 심경으로 신춘문예를 준비하다가 “수상 전화를 받고 통화를 끊자마자 길바닥에서 15분을 펑펑 울었던 것 같다”는 인터뷰도 남 얘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앞으로의 건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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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마침내 친구 뒤퉁수를 샤프로 찍었다
어느날 친구는 내 손목을 잡더니
내가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아?
커터 칼을 검지 마디에 대고 책상에 바짝 붙였다
친구는 나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뒤로 다가가 포옹을 하는 뒷모습으로
옷깃을 풀고 가슴속으로 뜨거운 우유를 부었다
칠판에 떠든 친구들을 적었다
너,너,너
야유가 쏟아졌다
지우개에 맞았다
불 꺼진 화장실에서 오줌을 쌀 때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손아귀가 커졌고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지가 이마를 툭툭
종례 시간이 끝나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선생님에게 장래 희망을 말했다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
하늘이 금세 붉어졌고
발끝에서 회전을 멈춘 낡은 공 하나를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진흙이 지구처럼 묻은
검은 모서리를 가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는 느낌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 이기리,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민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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