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점심시간,
서울에서 온 달마
김해자
밥 잘 먹고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있는
딸아이 시선이 먼 데 가 있다
아직도 근무 중인가 독서대에 세워진 책을 투과하여
벽을 째려보는 것 같다
텅 비었다 서울에서 온 달마
표정이 맹물 같다
열린 문 사이로 가만히 들여다봐도
달마는 미동도 없다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가 물을 개의치 않듯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들이 허공을 문제 삼지 않듯이
한국사와 동아시아사와 세계사를 편집하고 교정하고, 답을 알고서 문제를 내는 선생과 교수들과 상사와 상사의 상사에 둘러싸여, 이미 나왔던 문제와 아직 안 나온 문제, 적당히 풀지 못할 역사의 문제와, 문제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던 달마는 시방 면벽面壁 수행 중, 무한대를 닮은 8년 8개월, 문제를 내는 책만 만들다 어느 날 갑자기 문제를 때려치운 달마는 시계를 벗어 던졌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밥 벌러 가고 해 질 녘 밥 먹으러 오던
벽관壁觀을 마친 달마가
벽을 향해 모로 누웠다
이불에 친친 감긴 번데기는 시방 와선 중
방문 열어 두고 창문도 활짝 열어 둔 채
지붕에선 갓 깨어난 참새 새끼들 삐악 대는 소리
구우꾸우우꾹 방점 찍어
산비둘기 두어 번 울고 간 뒤 뻐꾹새 울어 대는데
소리는 없다 일만 하던 달마는 서울에서 먼 길 달려온
달마는 아무래도 나보다 한 수 위
시간을 공처럼 굴리며 노는 것 같다
#
폐허 이후
김해자
1
고흐 그림 속에 있던
붓꽃 한 포기가 아랫집에서 이사 왔다
하늘을 향해 뻗은 돛대 같은 손들
이파리 하나하나가 정박 중인 배 같았다 넓적한 절망과
두툼한 고독을 싣고 생레미 정신병원에 서 있는 아이리스,
내가 아니다,
내가 없다는 말
한 움큼의 알약 같은 비애와
바짝 붙어 따라오는 색색 물감
선잠 속에서 무언가 심장을 잡아 뜯어내는 듯한
긴긴밤이 지나가고
천 마디 말을 잃어버렸을 때 그림 속에서 탈출한 듯
붓꽃이 솟아올랐다 비현실적인 고결함으로
입에 문 붓
감춰 둔 속엣말 토해 내듯 젖혀진 입술
눈 뜰 수 없는 어두운 바닥에서 잊어버린 말들이 방문했다
눈발 헤치고 밤새 달려온 왕진 의사처럼
떼어 낸 심장을 꿰맞추는 보랏빛 몽환
붓이여 꽃이여 당신은 대체 어디서 오는가
2
붓끝이 무뎌진 자리마다 폐허,
뭉개 버리고 싶은 날들이 지나갔다
어느 한 날 폐허 한가운데 곡진한 모음 같은
열매 주머니가 달렸다
울퉁불퉁한 신의 손가락이
꽃은 언제부터 열매를 생각했을까
시인이란 열매를 생각하고 꽃을 피우는 사람이 아니라
꽃이 핀 다음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말,
주워섬기기 시작했을까 나는
지구가 돌기 시작했을 때부터
태양을 바라 뛰는 심장의 궤도
내가 생기기 전부터
폐허가 되고 말
꽃 이후에도
꽃차례를 듣는 영혼의 귀
불구의 말이 돋을 때마다
한 방울씩 흘러내린 꽃받침의 눈물
움츠러들고 작아지다 맺힌
씨앗으로의 귀향
발가벗은 몸
꽃과 한통속이 된 빛의 음절
어쩌자고 나는 꽃의 시간을 훔치고 말았을까
끝내 가닿지 못할 당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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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치는 소년
안희연
당신이 또 나를 깨웠군요.
당신이라는 작은북을 두드립니다.
기어이 나를 이 꽃밭으로 데려왔군요.
할머니를 그리워했잖아요.
꽃구경은 실패로 돌아갔어요.
이곳은 꽃밭이지 법정이 아니에요.
할머니 꽃 좀 봐 지천이야. 꽃 좋아했잖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머니가 주저앉았죠.
간청해도 소용없었어요.
오랜만에 몸을 입어 무거우셨을 거예요.
입김 한 번에 꺼지는 촛불처럼 할머니.
그것이 죽음의 일인 걸요.
죽은 사람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어요.
이 꽃밭을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계속 나를 이곳에 세워 둘 건가요? 나는 이 꽃밭이 아파요.
당신을 두드리는 것이 나의 일인 걸요.
왜 그래야 하죠?
내게는 북이 있고, 북을 치면 흘러나오는 음악이 있으니까.
북이 먼저인가요, 음악이 먼저인가요?
꽃밭이 먼저 있고, 꽃밭보다 먼저 꽃밭의 슬픔이 있죠.
나 이 꽃밭을 불태우면 당신도 사라지나요?
오, 가엾은 작은북, 이곳엔 문이 없어요.
그럼 나는 어떻게 들어온 거죠?
의미 없이도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해요.
왜 하필 꽃밭이었어요?
당신이 할머니를 그리워했으니까.
당신은 누구죠?
이야기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삶은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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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에 토끼가 산다
여세실
플루트도 가르치고 피아노도 가르치는 이웃집 마당에 토끼가 산다 하얀 토끼가 토끼장 안에서 마당을 등지고 앉아 털을 고른다 귀를 기울이면 벅벅 몸을 긁는 소리가 난다 눈을 떴다 감았다 뜬다 마당에는 파란 꽃 혼자 피는 꽃 무더기로 자라는 파꽃 말하지 않아도 안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 이다음 생에는 돌멩이로 태어나고 싶어 영수는 혼잣말을 중얼러길ㄴ다 모서리가 다 깎여 나간 돌멩이 가볍고 날쌘 돌멩이 어린아이가 주워 물수제비를 뜨기에 적당한 돌멩이 지붕 끝에 매달린 빗방울을 볼 때 영수는 잠시 놓여난다 퐁 당 퐁 당 파문이 퍼져 나가고 영수는 고요하다 영수는 가끔 노을이다 영수는 가끔 야산이고 영수는 자주 뒷걸음질이다 영수는 영수일 때 이따금 틀리곤 한다 틀린 영수는 토끼를 보러 간다 토끼는 꼼짝 않고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자다 깨어 몸을 늘인다 토끼가 한 번 뛴다 살아 있어 살아 있지? 초등학교를 지나 캠핑카가 주차되어 있는 골목을 지나 작은 도서관을 끼고 이용원 맞은편 골목에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노래 속의 토끼가 점차로 깜박 철장 안에 토끼가 무더기로 철렁 영수 마음속 토끼가 마구잡이로 켜졌다가 꺼질 때 영수는 알파벳을 거꾸로 외운다 토끼는 전생에 폭풍우에 휩쓸려 간 개미집이거나 눈밭 위 발자국이었을까 토끼는 영수가 다가가면 하던 일을 멈춘다 네가 바다를 더난 불가사리이거나 밤하늘이 지겨워진 별이라도 너는 너 나는 나 토끼는 자주 밥을 거르고 주인은 매번 토끼의 이름을 다르게 부른다 토끼는 마치 냇물 언젠가는 총성 철장 밖의 마주침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면 토끼는 기지개를 켠다 토끼는 대답을 하지 않기에 영수는 계속 되묻는다 너는 갓난애의 도리질 너는 세상에서 제일 투명한 대괄호 영수는 토끼에게 각설탕을 건네는 상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담벼락이 젖어 있다 토끼가 계속 토끼라면 영수는 한 번쯤 노래가 되고 싶다고 바란다 영수가 머물다 간 토끼장 앞에서 이웃들이 멈춰 선다 아무도 플루트도 피아노도 배우지 않고 토끼만 보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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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이덕규
눈에 겁이 그득한 토끼는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의 사소한 위험과 기척을 수신한다
언제든지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의 머리 위헤 안테나처럼 귀가 솟아 있다
갈수록 귀만 자라서 결국 귀를 잡힌 토끼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발버둥 치는 일
발버둥으로 곧장 서역에 이르는
허공의 지름길에 대해 그는 잘 알고 있다
누굴 해코지 해본 적 없는
이 착한 초식성의 귀때기가
제 어린 새끼들이 위험에 처하면 곧장 제 입으로 먼저 물어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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