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들 남긴 술잔엔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5. 18. 16:18

 

   동지들 남긴 술잔엔   

    
  
    
   빈 잔 위로 슬며시 비껴 앉은 석양은
   뺨 위에 달아오르고 취하지도 않아
   비틀거릴 수 있던 자유는 어디에
   어눌해진 말솜씨가 자랑이 되는 시대
   그만큼 희망을 이야기하진 않아
   나빠진 건 아냐
   좀 더 진지해졌을 뿐이지
   진지하다는 말도 필요 없는지 몰라
   다만 우리에겐 한갓 치기도 정열도 아닌
   무언가 남아서 부여잡고 싶은 게 있지
   그걸 말로 표현하지 못한대서 뭐 나빠
   어쩜 서로 등 다독거리는 기다림은 아닐까
   그것마저 낡아버린 시대
   그만큼 조급해하지도 않았어
   아니 길이 너무 멀다는 깨달음
   그 깨달음을 알기까지 우린 얼마나 많은
   선배들을 잃어왔던가......
   우리가 늘 비판하고 질시하던 그 노땅들
   그들이 남겨놓은 건 없어
   땀냄새나 맡기 위해 모인 건 아니잖아
   위로도 필요 없지
   때론 지겹기도 해 올바르지 않겠지
   다 마찬가지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지
   저렇게 떠들던 녀석들 이제 보이지도 않아
   남아서 잔만 채우면 잔만 들어도 슬퍼지는 걸
   누군 안 그렇겠냐며 서로 믿을 수 있다는 힘
   그 힘 때문에 사그라진 청춘들도 많았다는 것
   그 청춘들 때문에 더더욱 의식하며 살기도 해
   살아남는다고 존중받지도 못할 치열한 시대
   서로 바득바득 우겨대던 알리바이는 없어
   옆에서 고개를 떨구던 이에게 왜 우린 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는가를 반성하고 있지
   며칠 전 안부로 위안을 삼기엔 괴로운 추억
   추억의 한 줌 재를 털면 일어서는 얼굴들
   불우한 영혼들이여 이제 잔을 비우자
   성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성낼 줄 아는
   단호함까지 배운 우리들이기에
   이깟 슬픔쯤 거두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다가서는 기억들, 그 옆 언저리에서
   지금 이렇게 어깨 처진 얼굴들은
   또 왜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일까
   고단하게 떠나는 자리에서
   석양이 남겨둔 속삭임은
   그 파리하게 떨고 있는 허공은
   무엇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