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시 같은 산문을 한편 더 읽다)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9. 22. 12:55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 같은 산문을 한편 더 읽다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산문 :: 
 
   새날이여, 이제 우리를 지난해의 무덤에 덮인 수많은 거짓과 거짓의 말들로부터 떠나게 하시고, 매일 밤의 허약한 꿈과도 이별하게 하십시오. 
   조금씩 더 깊이 썩게 하시고, 그러나 썩음으로써 제 정신을 아주 잃게 할 것이 아니라, 제 정신의 싸움의 본령을 재빨리 깨달아 알게 하시고, 운명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를 주시고 그리하여 언제나 썩음의 즐거움, 시듦의 위대함에 경배하게 하십시오. 
   시간에 강한 자가 되게 하시고 길고 긴 복도에 끝없이 울리는 바흐의, 제목도 없는, 사랑의 노래처럼 시간에 끌려가는 자가 아니라 시간을 끌고 가는 자가 되게 하십시오. 
   조금씩 더 어리석어지게 하시고, 어리석음으로써 최후의 어리석음을 극복하게 하시고, 어리석음이 이 시대에선 오히려 칭찬받게 하십시오. 
   이 수많은 거짓말 속에서 단 하나의 참말이 있다면 그건 바보라는 말임을 믿게 하십시오. 
   아침엔 장님이, 대낮엔 귀머거리가, 저녁엔 절름발이가 됨으로써 스스로 자기의 허약함을 깨닫게 하십시오. 
   어울리지 않는 날개를 달고 자기를 잃어버린 시대에서 헤매는 인간들. 
   원컨대 우리에게서 이 미혹의 날개를 떼어 주시고, 자기에게도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돌아간다는 일이 한 모금의 따스한 물처럼 사랑스럽게, 가볍게 하여 주십시오. 
   어디엔가 있을 우리 본디의 자리를 찾아 우리를 늘 시험하게 하십시오. 
   끝없이 시험하는 것만이 먹는 일보다 영원한 것임을 인정하게 하십시오. 
   죽은 아이들을 결코 잊지 말게 하십시오. 
   지난 여름 나는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때 거리는 열기와 먼지로 한없이 더럽고 말들은 공중에서 만나며 몸부림치며 얽히고, 사람들의 얼굴은 번들거려 차마 서로를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습니다. 
   도시 한복판, 모든 것이, 휴지 조각들조차도 분노에 찬 눈초리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 땀과 열기로 번쩍이는 거리 한복판에서 믿을 수 없이 튀어나오는 아이 하나를 만난 것입니다. 마치 어린 왕자처럼 당당하게, 그러나 하늘에서가 아니라 지하에서 그 아이는 불쏙 솟아 나왔습니다. 
   거의 벌거벗었고, 형편없이 가는 팔다리며 마른 엉덩이는 일부러 먹물이라도 칠한 듯 거뭇거렸지만, 그러나 그 눈은 결코 세 살짜리 아이의 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흔 살의 교활함에 젖어 빛났습니다. 
   어느 주머니에선가 동전이 하나 떨어졌습니다. 
   그때 번개처럼 달려들어 동전을 집어 들고 수확의 기쁨으로 달아나던 그 눈, 세 살짜리의 그 슬픈 탐욕은 모든 늙은 탐욕들을 압도해버렸습니다. 
   모든 거짓이 거기 있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눈부신 아이가 거기 있었습니다. 나의 아이도 있었습니다. 백일도 못 되어 죽은 나의 아이, 그 전에 수없이 죽은 나의 동생, 언니...... 
   아아, 언제나 새날엔 원컨대 자주 울게 ㅎ시고 눈물이 우리 살肉의 지붕에 넘치게 하십시오. 우리의 눈물이 이 땅의 곡식들을 기름지게 하도록, 우리의 눈물이 전쟁과 시기猜忌와 미움을 씻어 가도록. 
   우리의 눈물이 이 메마른 땅에 비를 채우고 바다를 살찌우도록. 
 
   결코 우렛소리를 잊지 마십시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기쁜 마음으로 우렛소리를 기다리게 하십시오. 
   당신의 우렛소리는 때로는 무참히 떨어지는 꽃잎으로, 또는 가을의 평화로눈 낙엽으로 오실 것입니다. 
   당신의 우렛소리는 박쥐들의 날개를 떨게 하시고, 마침내 무상無常으로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새날엔 언제나 시간이여, 모든 죽은 아이를 깨우시고, 착한 이의 잠에 축복을 내리시고, 탐욕엔 뇌출혈을 일으키게 하십시오. 
   거짓엔 무덤의 흙을 덮으시고, 단 하나의 우렛소리를 보내십시오. 
 
 
 
# 강은교, 시·산문집 "꽃을 끌고" (열림원, 2022) 
 
 
 

 
 
 
강은교 시집을 계속 읽고 있는 주말입니다. 
오늘은 마치 주기도문처럼 유유히 흐르는 문장 하나를 함께 올려놓습니다. 
무릇 시인은 산문 역시도 제법 잘 써야 할 일인가 봅니다. 
 
즐거운 오후시간 되시기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