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단테, 종로학파 시집
차례
시인의 말
-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 침묵보다 더 고요한 죽음의 행진
- 바비도 기행
-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
- 동지들 남긴 술잔엔
- 태풍의 눈
- 그해 여름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 시인 류시화씨와의 대담
- 밤의 말들
- 겨울, 그리운 집
- 그래 이렇게 사랑하고 난 다음
- 노란 신호등
- 배우, 배우의 연인, 배우의 아빠
- 거위의 꿈
- 망상과 기억 사이
- 사랑의 변주곡
- 챗GPT로 쓴 '이음 1977'
- 2035년, 우리가 살던 아파트 외벽
- 더 글로리
- 꽃샘추위, 3월의 함박눈이 익숙한 시대
- 술이 덜 깬 아침
- 마리를 위하여
- 동물도 그들처럼
- 양극화 사회에서 재정 지출 없는 내수 진작에 관한 한 고찰
- 자존심
- 봄날, 그들도 우리처럼
- 봄날, 연작
- 봄날, 다행이다
- 봄날, 인구분포
- 봄날, 비와 당신의 이야기
- 2036년 수요일, 그 거리에서
- 마리의 일상
- 봄날, 마지막 휴일
- 오늘이 가장 예쁠 때야
- 오월의 여름, 부고
- 때 이른 장마
- 동태의 안부
- 내게 문 열어주던 그녀
- 경의선
- 오월의 마지막 비
- 카카오톡
- 자유와 평등
- 오빠 좀 그만 찾어
- 아침의 새소리
- 마케팅 전략
- 앙가쥬망
- 작가란 무엇인가?
- 우리도 이빨을 조심해야지
- 기억에 관한 아주 짧은 목록
- 주말
- 시를 쓴다는 것, 쓰려고 하는 것
- 고래 한마리
- 광화문 네거리의 왼손잡이 동상
-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소금기가 있다면
- 2023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 섬에서 먹던 성게알만큼 반짝이던 눈동자에서
- 황인찬풍으로 읊는 2023년의 연애시
- 황인찬풍으로 읊는 별 생각
- 그믐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재즈
- 황금족발
- 시인 이문재의 편지를 읽다
- 밥을 위한 시에 관한 한 변주곡
- 작가라는 모멸감에 대하여
- 아코츠네 공주의 실험실에선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 어쩌다 마주친, 그대
- 이로운 사기
- 어제 오늘 그리고
- 장마
- 1987년 여름
- 작가란 무엇인가
- 뿅뿅
- 단식농성
- 장마
-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면서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 독립문역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기 시작했다
- 장마가 숨을 고를 때
- 운전과 전운과 전우의 우정
- 딱따구리의 진화과정
- 악귀
- 보름만 참으면 돼
- 리바운드
- 소울
- 시
- 시
- 올빼미
- 새벽, 처진 풀잎에 영근 네 눈물도
- 그리움이 그림이 되고 글이 되고
- 눈물지으며 웃어주는 말간 들꽃들처럼
- 내 보금자리, 폐허
- 오로라 공주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 늙음을 이긴다는 것은
- 음악들
- 일 없습니다
- 에필로그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노르웨이의 숲을 가보셨습니까
- 나랏말싸미
- 가을비 우산 속
- 헤어질 결심
- ( 빈 칸을 채우시오* )
* 흙피리, 들장미 핀 환상의 나라에 서서, 야경, 이유, 성당전야, 산하서시, 4월의 눈, 낙서 Ⅰ, 그건 너희의 행복이 아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개도 보호하자, 산 1번지 아저씨, 가을 몽타쥬 - 序, 가칭 <反가을論>, 43241011.14:8, 우리의 詩, 벽 (?), 허구로서의 政治經濟學犬論, 사정공원 - 1 (斷想), 反詩, 꽃에 대하여, 길의 노래 Ⅱ, 친구의 詩, 자장가, '민주시민' K,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의 가을은, 존재는 푸르른 기억에 사로잡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자의 반성, 실로암 합창단, 喪失, 비로 인한 감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화장실 변기에 앉아 똥을 누다가, 저녁상 앞에서, 고요한 저녁-밤까지, 버스 안 사람들, 산책 1, 직주저널 1, 고독의 성 나르샤, 구체화된 시작 1, 새해 벽두에 부쳐, 미래, 노예의 시 1, 벚꽃, 좋은 습관, 창작론, 헤이리의 여름, 연정, 친구, 친구 2
※ 서평 : 처연한 그리움과 초연한 무지개 사이 (정독, 종로학파)
시인의 말
사색과 통찰이 무의미해지려면 그 반대편의 무엇인가가 이들을 대체할만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해요
그런데 사색의 반대편은 그저 즉물일 뿐이요 통찰의 반대편은 오로지 표피일 뿐입니다
물론 감각만으로 지배할 수 있는 세계에서는 이들만이 전부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
사조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트렌드라는 뜻예요 시대적 유행이라고 봐야죠
다음의 유행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건 디스코의 시대에도 록은 건재했고 랩의 전성기에도 발라드는 꾸준했어요
음악에선 빌보드와 그래미 등이 판관 역할을 했다면 문학에서의 그 역할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겠죠
평론가들의 편의에 기회가 함몰될 필요는 없습니다
협력할만한 '가치'에의 동의를 못얻고 있는 시대죠 정확히 말해
사람들은 결코 문제를 외면하지 않아요 오히려 문학이 개인을 핑계로 사회를 외면한 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대중들도 문학을 더 멀리하게 됐다는 해석이 차라리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문학 역시 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겁니다
생존의 길이 고작 자본에의 투항만 있는 건 아닙니다
욕망은 구름처럼 끝모르게 자라고 그 욕망의 근원은? 모르겠고
2023년 9월
호수를 품은 정발산 기슭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나는 너다, 벽을 문으로*
짐짓 너스레를 떤 시인이 있고
내 오랜 청춘들이 비를 맞았지
광장을 걷던 낙타가 비를 맞고
저문 강가에 돌 하나를 놓으면
나지막히 부를 수 있는 이름
핸드폰만 계속 만지작거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발신음은
이제 고음부를 향해 치솟는데
여보세요, 낙타가 먼저 물었어
어떻게 하면 사막을 건너냐고
함께 갈 수 있겠냐며 또 웃고
내 등에다 물주머니를 챙기면
어느덧 광화문에도 비가 멎고
다시 또 가을, 햇살, 긴 동행
낙타는 슬쩍 내 손을 잡았지,
내 손은 그의 볼을 꼬집으며
함께 웃겠지
너는 나라고
벽은 문이고
* 황지우, 임동확
침묵보다 더 고요한 죽음의 행진
그 수줍음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리
더 이상
걷지 않는 자가 되지 않으리
바비도 기행
화석처럼 굳어버린 기억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영웅을 갈망했는지 모른다. -
새로운 신화가 입법화될 무렵엔 반드시 노여움에 흐느끼는 백성이 생겨났고, 거리마다 북적대는 장님과 벙어리에게서 생활의 위안을 삼고자 했다. 패스가 지나가는 구멍에는 반드시 파란불이 켜져야 했고, 얼굴엔 언제나 검은 태양의 흔적만이 자리잡았다.
시내 곳곳에 신전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간혹 첫닭 우는 소리에 놀란 사제는 어깨 가득 면죄부를 지고 풍경소리를 대신했다. 물론, 퇴락하는 골목에서 여인들의 죄과는 비난받지 못했다.
적어도 이 노련한 신화를 대신할만한 것은 없었다. 때때로 들끓는 도적떼가 모셔온 토템적 우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백성이 독실하기를 원했다.
설익은 양심들은 술자리만 잦아지기 시작했고, 이교도들의 자취방엔 때때금 베드로가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익명다수였다. 최고의 형벌은 책임감에게 내려지곤 했다. 아무도 태양을 저주하지 않았다. 저주할 자격이 없었다.
창궐하는 영주들이 도륙을 일삼았고, 털 빠진 개들이 웅웅대는 공터에선 악취가 풍겼다. 가끔씩 청소부들이 차에 치여 죽곤 했다.
나환자촌에서도 매음이 끊이지 않았고, 처녀들의 하체는 점점 발가벗겨졌다. 다리에 송진을 바르곤 했다. 사제들은 영혼의 각성제를 팔러 다니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앞다퉈 무술을 연마했고, 다가올 전쟁의 의의를 알리는 홍보물은 명예욕을 충족시켜 주었다. 가끔씩 사제들이 데려온 처녀는 성심껏 그들에게 봉사해주는 대가로 면죄부를 지급받았다.
이윽고 이교도와의 전쟁이 발발하면, 갑옷을 입은 이들만이 살아남았다. 백성들의 추앙 속에 그들은 사제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젊은 사제들은 베드로의 후예가 되고 싶어 했다. 도덕적 알리바이는 매스컴을 통해 베드로의 부재를 알렸다.
사제들은 더 이상 아침부터 면죄부를 팔지 않았다. 마을 곳곳에서 복제품이 나돌았다. 술자리에선 면죄부가 화제로 떠올랐고, 개중엔 남몰래 숨겨둔 이도 생겨났다. 위대해진 신전은 연일 백성들로 들끓었다.
현실로 다가온 신화에 충성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동맥을 잘랐다. 베드로는 끝끝내 제물로 바쳐지지 않았다. 대신에 이교도들의 염통이 신문에 꽂혀지곤 했다. 말라가는 염통 위로 검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익명다수는 침묵했다.
- 그리고, 아무도 보살피지 않는 이곳
또 다른 기억들이 구겨지고 있었다.
이제 영웅은 몸서리쳐 우는 버릇이 생길 것이다.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
내가 아는 밤, 그 속으로 퍼지는 진동
그것은 모기향의 수명처럼 단시간 내에 와닿아, 먼발치 고속도로의 불빛까지 번져 있지
그 정적의 여운 ;
미처 내가 알지 못했던 밤, 그곳에서 발갛게 물들어오는 웃음소리
그리고, 내가 미처 듣지 못했던 그 소리는 언젠가 어머니 품에서 곤히 듣던 자장가처럼
낮은 선율로 정적을 깨우는데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는 저 목소리의 주인을 아는가
저 영롱한 불빛으로 마치 그대의 취기처럼 진한 목소리로 흔들리는 밀담의 주인공을,
진한 소주 냄새와도 같은 저 소리를
- 나는 알고 있어, 내 가슴속에서도 저 소리는 언제나 신앙이 되었지
그러나, 더 찾을 수도 없는 보석처럼 사라지고 말 뿐이야
저 소음 섞인 창공을 보아,
한 떨기 불빛이 흐르고 나면 그곳에는 멀건 별자리만 남아 눈물을 흘리고 있지
가슴 아픈 추억이 되었어
그대가 맡고 있는 공기에도 그것은 강물처럼 흘러서 이제 하나의 섬이 되었지
그 섬은 어느덧 육지와도 다른, 좁은 강가에 닿아 있어
퇴적되어 쌓이는 추억들은 저렇게 맑은 샘물처럼 빛을 내고 있지
땅 밑으로 자라는 온 식물들은 저 빛을 기다리지
때로는 그들의 여린 잎사귀를 흔들고, 가끔씩 흥분되어 떨리는 저 꽃들을 보아
이내 체액처럼 빨아들여져 뿌리까지 닿아 있잖아
그것들은 어느새 경전이 되어 추앙받고 있어
목마른 구도자들에게도 그것은 빛을 뿌리고 있지
가볍게 일렁이는 바람에게도 월계관을 씌워주었어
누구도 이기를 품지 않았지, 소멸하는 빛이 될 때까지는
모든 빛이 임종을 맞은 지금에도 오직 그 소리가 남았을 뿐
- 내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가 원한 저 목소리는 이제 아무도 잡을 수 없는
애달픈 추억들이 쌓여 잠들게 된 섬이지
그 섬에는 허기진 육신들이 정박해 있어
더 이상 음악은 들리지 않아
사그라진 불빛을 애도하며 기도를 하고 있었지
그 어떤 안온함도, 두려움도 없으니까
아무도 기도를 멈추지 않아
먼발치에서 다시 발갛게 물들어오는 저 소리
내가 미처 듣지 못했던,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들려오는 저 목소리는
이제 높은 선율로 흔들리는데
사랑하는 친구여, 저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일까
긴 노를 저으며 흐르고 있는, 저 섬과 육지를 오가는
거친 운명의 반려자는 누구일까
동지들 남긴 술잔엔
빈 잔 위로 슬며시 비껴 앉은 석양은
뺨 위에 달아오르고 취하지도 않아
비틀거릴 수 있던 자유는 어디에
어눌해진 말솜씨가 자랑이 되는 시대
그만큼 희망을 이야기하진 않아
나빠진 건 아냐
좀 더 진지해졌을 뿐이지
진지하다는 말도 필요 없는지 몰라
다만 우리에겐 한갓 치기도 정열도 아닌
무언가 남아서 부여잡고 싶은 게 있지
그걸 말로 표현하지 못한대서 뭐 나빠
어쩜 서로 등 다독거리는 기다림은 아닐까
그것마저 낡아버린 시대
그만큼 조급해하지도 않았어
아니 길이 너무 멀다는 깨달음
그 깨달음을 알기까지 우린 얼마나 많은
선배들을 잃어왔던가......
우리가 늘 비판하고 질시하던 그 노땅들
그들이 남겨놓은 건 없어
땀냄새나 맡기 위해 모인 건 아니잖아
위로도 필요 없지
때론 지겹기도 해 올바르지 않겠지
다 마찬가지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지
저렇게 떠들던 녀석들 이제 보이지도 않아
남아서 잔만 채우면 잔만 들어도 슬퍼지는 걸
누군 안 그렇겠냐며 서로 믿을 수 있다는 힘
그 힘 때문에 사그라진 청춘들도 많았다는 것
그 청춘들 때문에 더더욱 의식하며 살기도 해
살아남는다고 존중받지도 못할 치열한 시대
서로 바득바득 우겨대던 알리바이는 없어
옆에서 고개를 떨구던 이에게 왜 우린 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는가를 반성하고 있지
며칠 전 안부로 위안을 삼기엔 괴로운 추억
추억의 한 줌 재를 털면 일어서는 얼굴들
불우한 영혼들이여 이제 잔을 비우자
성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성낼 줄 아는
단호함까지 배운 우리들이기에
이깟 슬픔쯤 거두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다가서는 기억들, 그 옆 언저리에서
지금 이렇게 어깨 처진 얼굴들은
또 왜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일까
고단하게 떠나는 자리에서
석양이 남겨둔 속삭임은
그 파리하게 떨고 있는 허공은
무엇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태풍의 눈
이건 만화제목이 아니야
암 아니고말고 언젠가 네가 들려준
옆 마을 살던 순이가 집을 떠났다는
그래서 많은 어른들이 찾아 헤매던 때
그 시절 그 노래 신파조도 아니지
뻑뻑한 회사 일로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던
후배들처럼 십게 웃음도 못 터뜨리는
말단사원처럼 눅눅해진 옷차림마다 파고든
어설픈 유혹의 그림자로 오해해서도 안되지
사람들은 너무 쉽게 전화로 부조를 말하지
전화로 프로포즈하는 이는 없지만
그래서 무책임하다고 항변하지만
저것 좀 봐 저렇게 물밀듯 다가오는
홍수처럼 가뭄처럼 극단적이기만 하잖아
가랑비에 옷젖기 기다리는 신세대도 늙고
복덕방마다 바둑 한 수에 걸린 늙은 목숨
찌뿌드한 하루의 시작처럼 메스껍기도 하고
혹은 우왕좌왕 빈자리를 골라야 하는 전철처럼
그렇게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들 ―
목소리, 그래 목소리일 거야
지금 듣고 있는 것도 잘은 모르지만
암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그래서 생소하지도 않고 때로는
반갑지도 않은 채 또야? 하는 짜증도 섞인
그런 불청객만도 못한 푸대접에
이리저리 뒤틀어진 심사마냥 단번에 쏟아지던
버스에서 아줌마가 얼굴 붉히며 줍던 사과처럼
웃을 수도 없는 난처함에 시린 얼굴들처럼
그렇게 와르르 머릿속과는 전혀 상관없게
저 혼자 법석을 떨던 것들 말이지
그 어지러운 것들 속에서
저렇게 한 점 맑기만 한 것
그해 여름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태풍이 무질서하게 지나갔다
사람들 하나둘 긴 소매를 입기 시작했고
저마다 푸르른 그늘을 안고 나선다
이곳 인적이 드문 광장엔 여름부터
장마를 견뎌오던 플랭카드만 남아 있어
그 때묻은 천마다 피로가 역력하고
여대생이란 팻말을 든 아가씨들이
멀찌감치 피안의 저녁으로 사라지는 동안
내게선 가뭄 한번 제대로 일지 않았었다
그 부우연 얼굴 언저리엔 소나기도 잦아
언제고 한번 그을린 적 없는 상처
밤마다 모기와 싸우는 옆집 부부와
자가용마다 매단 접촉사고만큼
눅눅한 습관에 젖어버린 내 방안엔
오늘도 무사태평해야 할 그리움만 남는데
언제고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 머릿수만큼
마음속 상처들은 깊게 멍을 그리고
멍자국을 따라 푸르게 파인 손금
손금들이 망각의 철교 위에 또렷하고
그 철교 너머 쏜살같이 달리는 여름은
이제 막 차양막을 내려버리는 모양이다
아, 길지도 않았던 무더운 저녁이
점점 수그러들고 목숨을 잃어가고
그 잔혹한 운명 앞에 진 치고 앉은
내 허기진 추억들이 비를 맞는다
이런 비는 처음이야
하면서도 저마다 안주하지 못하는 만큼
낡은 수첩에서 하나씩 이름을 지우고
다시 사람들 우산을 털며 바삐 떠나가면
그 물 묻은 자리마다 반사되는 석양
공중전화박스마다 견고한 고독을 쌓아가고
덧없이 불쑥불쑥 자라는 그 그림자처럼
그해 여름도 너무 쉽게 저물었다
시인 류시화씨와의 대담
마른기침을 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선
여전히 꿉꿉한 냄새가 난다. 마치 장작개비처럼
그것은 서서히 젖은 복장을 해제시키고
노랗게 퍼져 올라오는 아지랑이에 취하다
문득 라디오 프로에 귀가 쏠리게 되면
전파 속에 갇힌 아지랑이의 지친 일상성과
내 몸 구석구석 퍼지는 독기 어린 비애는
동시에 하나의 전구빛으로 점멸하는 객기.
인도로 히말라야로 또 얼마 전엔 제주도로
맨손에 자전거를 끌고 고행을 자처한 용감함과
긴 머리칼의 고독이 우수수 떨어지던 감수성
높은 웃음소리만큼이나 가볍게 날려 보내는
끈기 있는 구도심에 대하여, 아무 말도 않는다.
제 이름의 평화, 어때요, 심오하죠. 하하
다시 기침이 난다. 버스 안은 여전히 후텁지근하고
후텁지근하다 못해 비질비질 땀이 쏟아진다.
나도 저런 고행의 길을 자처하며 떠나야 한 걸까,
아직도 아스팔트엔 칠이 벗겨진 금들이 묻어 있고
어젯밤의 치욕들은 저렇게 질주하는데
독특한 냄새가 나죠, 라즈니쉬의 냄새 같아요.
친구들의 결혼식에 가지 못한 건 시적이 아니라서
오, 나의 불우함이 가져다준 이 질시의 누더기.
오민석이 쓴 시론을 읽다가 잠이 든다. 누더기 속에서
선잠이 얼핏 깨고 나면 눈꺼풀 위로 가시처럼 햇살
따갑다.
구름처럼 부풀어진 몸을 뭉그적대며 버스를 내린다.
휘청 한다. 햇살은 따갑기만 한데,
어디서 그늘을 찾아 숨을 텐가.
아스팔트에 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나는
마른 눈썹 위 엉긴 땀을 닦는다. 손수건 가득히
축축해진 내음, 그때 덮쳐오는 전파의 복음.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칼날 같은 속단에 대하여
혹은 이부자리마다 꼬깃꼬깃한 땀자국들에 대하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고.
밤의 말들
1
전자담배 한 갑을 사서 돌아오는 골목마다
엄마들의 초조한 표정이 딸의 귀가를 재촉하고
그 메마른 얼굴들이 엮어내는 사사로운 말들과
연신 담배를 빨며 지켜보던 풍경 속에는
발목마다 차오른 아스팔트의 냄새가 역력하고
밤기운은 무서운 속도로 어두워지기만 했다
이 도시 아직도 많은 이들이 남아서
저마다 배반의 무게를 안고 현실이라 믿고
그토록 속아온 세월을 정 붙이며 저렇듯
힘겹게도 어린 딸들을 지켜내려는 이곳
계단을 오르면서도 그 표정들만 서성대는데
아직도 제 부모를 찾지 못한 아이도 더러 남아
퀴퀴한 어느 골목에선가 울부짖고
마주 섰던 어른들의 날카로운 금속성 외침
이 선 말들만이 번뜩이며 지내온 시절
나도 그 시절을 좇아 이 골목을 누볐던 기억
과거의 전력이 더더욱 죄스럽기만 한
말들의 유혹, 그 차디찬 환멸과의 동침
2
어린 내 방안에 가득 늙어가는 사랑은
이미 기침소리도 잦아진 고인의 그림자처럼
순간마다 철새처럼 부유하던 그 추억들도
부재한 흔적들만 남아 페이지마다 곱게 접힌
곱게 접어둔 책갈피를 하나둘 다시 펴보고
불청객처럼 요란하기만 한 전화벨 소리는
잊혀진 시간들을 더욱더 더디게만 만든다
그 누가 있어 이 시간을 운명이라 부르든 간에
펴진 책갈피만큼이나 혹 절실할 수만 있다면
그 말들을 어쩌면 지금이라도 믿어왔을 텐데
꼭 믿어오지 못한 세월을 탓하는 건 아니지만
3
옥상 꼭대기마다 견고했던 철탑들 모두
저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습관이 생겼다
날개 잃은 새들처럼 처량한 울음이 되고
미처 눈 뜨지 못한 새벽을 애써 따라나서고
마침내 성자들 연기처럼 자욱이 승화하는 밤
그리하여 죽은 자들이 산 자의 그것을 얻고
또 얻어낸 걸 벗어던지고 다시 떠나간다면
그 짧았던 울음소리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
가슴속 빼내지 못한 못을 부여안고 산다
그 녹슨 멍자국 위에 추억의 재를 뿌리면
사람들 우러르게끔 속여온 하늘의 별들도
구겨진 가로등 밑 동심원으로 몸을 뉘고
젖은 동심원을 따라 주름진 얼굴들마다
제각각 촘촘히 박혀 있던 그 말들도 이제
하나둘 불을 끄면서 사라지고
어둠 속 낮은 목소리만 남아
겨울, 그리운 집
한나절을 걸어온 길, 그곳엔 아직도 바삭바삭 밟히는 낙엽이 있고 저마다 두툼한 외투에 싸여 그 화음을 경청하는 밤, 남몰래 밟아보는 낙엽들에서 지난가을에 부르던 노래가 문득 흘러나오는데
내게도 그런 음악을 꿈꾸던 계절이 있어, 악보들이 쌓인 자리엔 장식음처럼 바람이 불고 그 흔적마다 스산히 뒹구는 낙엽, 이미 완연한 겨울로 흐르고, 철 지난 아쉬움을 달래려는 길목에서
호호 손을 불며 걷던 기억도 나는데, 나 역시 장갑을 마련해야지 하던 생각에 슬그머니 꺼내 문 담배, 그렇게 잊혀가는 것들엔 가슴속 꽁꽁 매어두던 그리움도 있어, 다시금 연기 속에 피어오르고
내 목소리도 곧 들릴 거야
건네준 편지 속 힘겹게 울던 표정
아무 말이 없었지
말할 수 없는 것들조차 괴로운
그 신열을 누가 모를까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들
모두 사라지고 난 저녁
물밀듯 흐르고 있는 곡조에 대하여
옆자리마다 피곤한 일상이 안식하는 그것을 그리고, 고독한 떠남이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
아직도 길가엔 바람이 불고, 어둑해진 자리마다 하나둘 가로등이 켜지는데, 저문 술집으로 향하는 마음 한켠 웅크리고 앉아 말없이 주고받는 위로처럼
한나절을 걸어온 그 길, 그곳엔 아직도 뼈저리게 그리운 낙엽들이 있고 사람들은 제각기 낡은 책가방을 꺼내 드는 밤, 남몰래 밟아보는 낙엽처럼 지난 가을의 설렘이 지는데
고개 숙여 떠나는 사람들 이제 가로등 불빛처럼 또 다른 흔적을 찾고, 그렇게 찾은 자리마다 새로운 그리움이 약동하는 시간을 꿈꾸고, 다시 사람들 모여들 시간이면 이 술집에도 지난 그 노래가 들리겠는지
그래 이렇게 사랑하고 난 다음
한 떨기 겨울마저 제 몸을 추스르고
녹아드는 언 땅 새순처럼 맞는
혹은 간밤에 쓰러진 나무 밑동에
더덕더덕 모질게 살 붙은 집착처럼
그대여, 추운 시간들의 길목에서
깊은 시름 거두고 잠을 청하노니
구슬피 우짖던 새도 쉰 울음을 내고
터벅터벅 걷던 길동무도 가방을 건네니
저렇듯 늘어진 어깨처럼
우리네 걸음도 때때로 낯설게 느껴져
간밤 그 어깨들 부여잡고
몇 년을 두고 떠난 이야기를 내놓고
막잔 하나씩 부딪치던 소리처럼
각자가 살아온 사랑은 아껴두는데
멀찍이 떠나갔네
우리네 배 한 척
두고 온 나뭇가지처럼
살랑거리던 그리움처럼
그 흔적들처럼
철 지난 절절함이 모여들던 이곳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던 기억
이제 이곳에서
잠시 잔을 또 들게나
부짖치는 술잔마다 묻는 입술
파르르 떨리는 울음소리는
그 뒤로 밀려든 깊은 시름처럼
또 사랑할 무엇을 기억하려고
제각기 떨어진 별처럼 주워 담는
이 얼얼한 가슴.
노란 신호등
한나절을 뒹군 낙엽 발밑에 툭 쓰러졌다
찬바람 잠시 멎으니 그동안 눈부신 햇빛
이제 곧 봄이 오나 싶은데 넌 내내 가을,
낙엽도 곧 저물겠지 하며 거리를 걷는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러게요 잘 지냈어요
주변이 시끄럽다
가드레일 따라 분주하기만 한 자동차들
각자의 사연을 싣고서 저만치 달려가고
촉박한 여정을 안고 고속도로로 향할까
라이트 켠 트럭 한 대, 요란히 사라졌다
다음에 또 보자
네 잘 지내세요
그래 (종료음)
차량이 뜸해진 거리, 또 낙엽이 뒹굴고
가드레일처럼 긴 그리움이 함께 뒹군다
봄은 가을로 향하는 시작, 다시 끔벅여
낙엽의 추억을 애도하며 점멸하는 달빛
(발신음)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망각을 재촉하는 별빛 두 개, 다가오고
배우, 배우의 연인, 배우의 아빠
난 그렇게 생각해
어차피 너도 알잖아 치열한 시간이 뭍에 오르게 되면 지독한 현실이 먼저인 거야 이제 뗏목놀음은 끝내고파 이 연극도 이젠 지겨워졌어 대학로는 아직도 좋아 은행나무도 마로니에도 아직 괜찮아 근데 돈은 못 벌잖아 어때 하지만 집도 사야 하고 애도 낳고 평생 배우로만 살 순 없잖아
넌 왜 맨날 안 된다고만 말해 말이라도 되려고 노력을 하는 게 먼저 아냐 그럼 뭣 하러 시작했니 이 길이 원래부터 등대였던 적은 없었어 여기까지 와 후회하는 거야 우리, 이렇게, 아직도 그대로잖아 난 이 일을 선택해 후회한 적 없었어 아니 적어도 계속 최선을 다했던 일이잖아 또
그게 문제야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 근데 아직도 망망대해야 어딘가에 스스로 정착 못하는 게 느껴져 엄마처럼 되려나 봐 후회가 들어 아니다 싶고 그래 변했어 변했나 봐 아빠가 나더러 미친년이래 이렇게 살 순 없어 솔직히 내가 너무 비참해 밤새 울었어 이젠 좀 행복하고 싶어
행복이 뭔데
행복이 뭐냐고, 뭔 줄 아는데... (fade out)
나도 그래
후회, 들어 아빠가 심했던 거야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으로 잘 생각했어 그동안 고생 많았고 앞으로 또 다른 걸 찾으면 돼 너, 아직 젊잖아 뭐든 잘할 수 있어
뭘 잘 생각한 거야 이건 변하지 않아 포기야 내 인생도 연극과 마찬가지라고 봐 포기하고 살면 사는 건가 젊은것도 아니야 현실이 너무 무서워 그래 조로증일 뿐야
거위의 꿈
- 1기 신도시 특별법
대지지분 18평이면 국평* 재건축할 수 있다?
육 개월 동안 스스로한테 던져왔던 수수께끼
재건축 분담금을 계산하고 도서관 책을 찾고
인터넷에서 계산식과 동영상을 찾아 헤매고
엑셀로 표를 만들고 가정사항을 빼곡히 입력
1) 현재 대지지분 = 18.3평
2) 공공기여분 = 1) * 0.15 = 2.7평 (추정)
3) 가용 대지지분 = 1) - 2) = 15.6평
4) 기본형 건축비 = 평당 0.07억 (가정)
4-1) 예상 사업비 = 4) * 1.33 = 평당 0.09억
4-2) 예상 계약면적 = 34평 * 1.55 = 53평 (추정)
5) 국평 건축비 (예상) = 4-1) * 4-2) = 4.8억
6) 계획용적률 = 300% (임대분 차감, 280%)
7) 필요 대지지분 = 11.75평 (추정)
8) 잔여 대지지분 = 3) - 7) = 3.85평
9) 일반분양 평단가 = 0.3억 (국평 10.2억)
9-1) 국평 대지비 (예상) = 10.2억 - 5) = 5.4억
9-2) 대지지분 평단가 = 9-1) / 7) = 0.46억
10) 일반분양기여금액 = 8) * 9-2) = 1.8억
그렇게 해도 분담금 3억 넘어, 안될 것 같은데
- 정부가 특별법을 내놓았으니 또 가능할 수도
다들 내 단지부터 재건축해달라며 아우성치는
되레 순번이 밀릴까 전전긍긍하는 초조함들은
30년을 늙어온 절망, 근심은 간데없이 사라져
새롭게 불쑥 솟는 욕망이 신파조로 간절할 뿐
예전 글일까, 이게 정말 '거위의 꿈' 맞나 싶어
지난 글을 뒤적이니 벌써 재작년 - 그 시효는?
"1기 신도시를 내내 살며 '재건축'을 바라는 거
어쩌면 부질없는 바벨탑, 일곱 빛깔의 헛헛함
그래도 여전히 그 꿈을? 명색은 계획도시인데
도시의 삶이 전혀 계획적이지 못했다는 문제,
아닐까..."
* 국민평형 (전용 85제곱미터)
망상과 기억 사이
한때는 절절하게만 흐르던 기억들도
시간이 흐르면 화석처럼 딱딱해진다
때론 착각을 해 현재형 망상이 되고
기억 속 굳은 망상은 점점 더 커가고
어차피 굳어질 거, 빗살무늬를 새겨
망상이 아닌 흉터라면 더 좋았으려나
끝끝내 동여매던 욕심 또는 의지였나
아뿔싸, 늙어버린 희망의 미련뿐인가
사랑의 변주곡
금이 간 얼굴
실제로 금이 갔다
또 다른 이별
연습해온 이별과도 사뭇 달랐다
그리움이란 그저 기다리는 일일 뿐
더 이상 그리움은 없는지도 모른다
(지나갔는데 아직 눈앞에 있는 버스)
철 지난 옛 유행가를 흥얼거릴 뿐
챗GPT로 쓴 '이음 1977'
- Artificial Intelligence
분당 삼백 타의 속도로 질주하던 프롬프터는 어느새 차이나타운 앞에 도착했고, 자유공원 꼭대기로 향하던 언덕에 서 있는 그곳은 좁은 계단과 골목들로 가득 메워졌고.
한옥 옛 마루가 네모난 콘크리트 절벽 속에 몸을 숨긴 요새, 인천 앞바다가 석양에 물들고 함께 선 소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고.
내 꿈이 한때는 건축가였어.
물건을 매만지던 아이도 이내 몸을 숨기는데 도통 찾을 수 없는 미로 같은 방들을 뒤적인 오후, 내 꿈들도 그 미로를 닮아 온통 숨어버렸고.
촘스키가 말했대, 챗GPT는 무책임하다고.
모든 가치의 체계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닮았어.
결국 '증감'이 아닌 '선택'의 문제였을까.
시간의 유한대성을 간과하면 안 되니까.
- 인류문명의 최첨단 복합체는 자본주의 말기 증상이야.
분당 삼백 타, 오타를 빼면 이백 타도 안 나올 휴대폰은 이제 프롬프터를 덮고 프롬프터보다 더 빠르게 언덕길을 내려오고. 눈 밑으로 선한 풍경들은 온통 재개발된 21세기의 마지막 창작.
2035년, 우리가 살던 아파트 외벽
- 국토교통부 공고 제2022-1602호*
풀썩
주저앉은 콘크리트
점점 더 깊게 팬 눈금
나이테를 닮았나 보다
중년이 된 사내는
이토록 위태로운데
물이 새는데
승강기도 멈추는데
그저 살란다
더 잘 지었어야 해
후회도 소용없지
기초만 튼튼하면 안 무너져
버릴 수 없는 게 많아
버려야 새로 지을 텐데
늙어가는 습성만 배웠어
안쓰럽다
지겹다
끔찍하다
다들 떠난다
떠남보다 끔찍한 게 없어
낯선 사내들 밤마다 싸우고
알 수 없는 언어들
비릿한 냄새들만 가득해
어떻게 더 살라고
플래카드만 나무에 걸렸다
재건축 추진준비위원회
추진은 얼마나 걸릴 것이며
준비는 또 얼마나 걸릴 것이며
어떻게 더 살라는 건데
위원장이 목청을 높였었지
교통망이 필요합니다
학교는 어찌 됩니까
옆 단지가 끝나야죠
민원마다 AI가 답한다
그렇게 살란다
늙어가는 습성만 배웠어
안쓰럽다
지겹다
끔찍하다
다들 떠났고
남은 빈자리는 폐허다
* 주택 재건축 판정을 위한 안전진단 기준 일부개정
더 글로리*
영광의 무늬를 이름에 새긴 그들
가문의 역사는 세기마저 뛰어넘었다
오래된 아주 오래된 역사에선 면죄부를 얻고
최근의 가장 최근의 뉴스에선 또 죄를 지었다
이제 곧 역사가 나서서 그들의 죄를 사하노라**
어쩌면 익숙해진 운명 탓
아무도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도덕이 밥 먹여주냐, 술잔을 냅다 집어던진 선배
그들의 영광을 위해 묵묵히 출근하는 직장인인데
선배의 역사야말로 배신, 분노, 환멸의 낙인인데
더 이상 문제제기를 안 한다 못한다
더 글로리
자본주의 질서의 최고봉
삼대가 먹고 살 수준을 넘어 국가 전체가 충성!
트로피와 월계관의 <자유>를 얻은 경외의 대상
잘하면 위인전도 쓰겠는데, 이미 나왔어 치
다시 술잔을 기울이면 속이 또 쓰리단다
분노일까 부러움일까 부러우면 진다던데
* 2023년 넷플릭스 드라마
** 이정아의 시에서 차용.
꽃샘추위, 3월의 함박눈이 익숙한 시대
20도를 웃돈 날씨의 끝, 차가운 봄비
차분하더니 이내 세차게 불어닥친 바람
영하의 꽃샘추위가 온 동네를 덮쳤다
이 정도 추위는 낯설지도 않아
전방을 다녀온 그가 무심히 뱉은 말도
온통 호들갑일 뿐인 TV 뉴스들도
다가오는 봄은 정녕 믿었겠지만
봄이 안 오면 또 어쩔 건데
짐짓 되묻는다 한 번도 안 해본 상상
모든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시대
기어코 늦겨울의 끝은 초여름이려나
포천에 내린 함박눈을 보면서
차라리 예쁜 곰인형이라도 찍어낼까
전방을 다녀오지 않은 내가 중얼거린다
영하의 꽃샘추위도 발길을 곧 돌리겠지
봄이 안 오면? 슬플 것 같아
그가 대답하며 고개를 든다
하늘 구름 별 그리고 꽃
꽃이 된다
술이 덜 깬 아침
먼발치
게슴츠레한 눈을 뜨면 허연 달빛, 아파트 옥상에 걸려 있었다
술이 술을 낳고 배가 배를 낳으면 어느덧 청년이 중년이 되고
중년은 이제 곧 노년으로 향하겠지
어설피 울음을 낸 새들 몇 이른 나뭇가지 털며
또 다른 세상을 지향하고
고양이 한 마리도 잽싸게 몸을 숨긴다
이른 새벽
어두컴컴한 전망이 서서히 밝아올 때쯤이면
이내 속 쓰린 멍울에도 꽃이 필까
모르겠어,
구겨진 영수증 하나 툭 떨어졌다
12만 5천 원
언젠가 노래방에서 한껏 노래를 부르다 만 선배
조용히 눈물을 흘렸지 돈이 없어서였을까
비참해지는 노년을 애도하며 그게 곧 운명임을
직감한다
아뿔싸, 회사에 또 늦겠어
서둘러 슬리퍼를 끌고 향하는 집
벚나무도 싹을 틔우고
바람은 실랑이며 봄을 재촉하고
더딘 봄을 못내 아쉬워할 법한데
노년의 봄은 여전한 겨울이니까
마리를 위하여
- 탄소중립 시나리오
그거 알아,
지구 온도가 1.5℃ 더 오르면 온 생명체가 멸망한다는데? 촘스키가 인터뷰한 책도 있어
그럼 어떡해야 한다는데, 고기를 먹지 않으면 될까 또 화석연료를 더 이상 안 쓰면 될까
이미 너무 늦었다잖아, 그래도 1.5℃는 현실적으로 너무 힘든 수치? 아닐까 싶어
어때, 마리도 동물이잖아 강아지도 고기를 좋아하니 사료부터 바꿔야지
맞아, 콩고기는 어떨까? 좋아하던데 아빠가 맨날 주던 황태채도 안돼 먹이지 마
마리가 힘껏 다리를 세우더니 꼬리를 흔들며 안방으로 사라졌다
마리는 말 한번 없이 아픈 척을 하며 다리를 절뚝인 적이 있다
오늘도 마리는 산책을 가자며 연신 뛰어든다 지구가 멸망하든 말든
봄바람은 싱그럽고 목련꽃 하나둘 향기를 내뿜는 계절, 여름인가?
(SUB)
한 폭 그림을 그리듯
두꺼운 구름 자욱한 하늘에 펼쳐져
강아지는 바삐 뛰어다니며
어딘가에 있을 육식의 냄새를 맡습니다
친구와 함께한 날, 미래를 이야기하며
뜨거운 온도로 삶은 달걀의 맛을 논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위험하다는 사실에
서로가 아픈 마음이지만
강아지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예요
마리를 지키는 게 우리한테 달렸음도 알지만
앞으로도 삶은 달걀은 계속 뜨거울 겁니다
마리와 우리 모두 사라질 미래를 위해서.
(END)
그거 알아,
이제 봄 가을도 없어질 거야 겨울 끝나면 곧 여름 되고 여름 끝나면 곧 겨울 되고
봄이 없어지는 게 슬퍼, 초여름에 피는 꽃보다 매화나 벚꽃 또 목련이 더 예쁜데
가을이 사라지는 건 더 슬퍼, 코스모스 일렁이는 강가도 찬연하기만 한 단풍잎도
모두 다 사라진 저녁, 다만 뜨거운 바람 금세 차가운 바람만 맞으며 지낸다는 거
그건 안 되지,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당장 고기 끊어 화석연료를 없애야 해
그거 알아,
온 인류가 온 생명체가 고기를 끊지 못한다는 거 화석연료를 없애지 못한다는 거
그래서 멸망해야 한다는 거, 알아?
동물도 그들처럼
1
사자 부부가 홀연히 집을 떠난 까닭은 순전히 샘물가 근처의 집값 때문이었다. 숫사자의 호령 하나만으로도 일사불란한 숲속에서 그들의 후예 노릇을 한 늑대 부부는 막상 차기 왕좌를 뽑는 투표에서 고작 비슷한 용모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여우 부부한테 "민주적 절차"에 따라 왕좌를 넘겨줘야만 했고, 일거에 숲속을 장악한 여우 부부는 멧돼지들이 출몰하기 전까진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절대권력을 갖고 영원한 태평성대를 누릴 법도 했었어.
2
늑대 부부를 호위하던 너구리, 다람쥐, 산토끼, 뱀, 노루들은 마치 한 목소리처럼 그 "민주적 절차"를 따지며 물었고, 가끔 생뚱맞은 주장들도 했었는데... "샘물을 하나 더 파자" "모두가 샘물 주위에 모여 살 필요는 없다"는 주장들을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단 한번도 샘물 주변을 떠난 적 없었어. 그게 "내로남불"이지. 단 한번도 "강남좌파"라는 거짓말을 믿지 않은 현명한 동물들은 늑대 부부만은 못해도 충분히 수려한 용모를 띤 여우 부부가 해결사라고 착각했던 게 틀림이 없어.
3
누가 더 잘못했나를 따지면 뭘해, 결국 여우 부부는 사자를 닮긴커녕 늑대만도 못한 게 아닐까 해 그 무능력만 탄로났어. 어차피 선거 결과에 따르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절대 임기는 보장되어야 했어. 그걸 질시하거나 호시탐탐 새로운 권좌를 꿈꾸던 이들에게는 그동안 거칠게 비판해온 숫사자의 냄새가 났을 뿐이지.
4
숲속에 큰 불이 났었지. 모든 동물들이 순식간에 숲밖으로 도망치려는 그 때, 거대한 나무 하나가 쓰러져 그만 외딴길을 막아버렸어. 많은 동물들이 불에 타 숨지고 더러는 산불을 피해 도망가다 낭떠러지 계곡 아래로 떨어졌을 뿐인데, 늑대 부부를 호위하던 무리들이 그걸 빌미로 해 여우 부부를 신랄하게 비난하기 시작했어. 여우 부부도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게 그건 "종북좌파"의 선동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연신 불화살만 쏘아대던 옆마을 산적떼들을 계속 경고했지.
5
그리고,
양극화 사회에서 재정 지출 없는 내수 진작에 관한 한 고찰
아이를 둘만 낳으면 집 한채를 주겠다, 정부가 내놓은 엉뚱한 대책이 큰 화젯거리가 됐다. 아이만 낳고 집을 얻을 수 있다는 참신한 발상은 고위 관료들이 짜낸 아이디어다. 대통령은 아마도 이를 크게 격려하였을 테고 신문들은 저마다 마땅한 대안도 없이 그 부적절함을 성토하기에 바빴다.
아이를 하나만 낳아도 집 한채를 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을까, 베이비 붐 세대들한텐 어떤 혜택이 주어졌을까. 문득 과거의 일들을 궁금해 하던 중에 인구 10억 명을 돌파한 중국에서 대다수 갓난아이들한테 출생신고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얘길 떠올렸다.
온라인에서 숙소를 예약하면 한번은 공짜로 내주겠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다. 사람들이 하도 놀러 가질 못하니 직접 팔을 걷어붙인 모양이다. 누구는 일하러 직장을 나가야 했을 테고 또 누군가는 돈이 모자라 여행을 포기했을 텐데 정부가 나서서 숙소까지 용돈을 주겠다 하니 또 일부는 환호성을 지르고 또 나머진 시큰둥한 표정이겠다.
언제부터인가, 복지라는 낱말이 마치 무슨 적선과도 같아서 때때금 그걸 받는다는 게 또 다른 모멸감이기 십상인 세상이 됐지. 누구를 탓할 수도 망설일 수도 없이 모두가 쏜살처럼 달려가는 지원금 접수창구에는 늘 심드렁한 표정을 한 공무원이 앉아 심사를 하겠고.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은 공무원한테 너무 화가 나서 그만 관공서 담벼락에 스프레이를 뿌려댔지. 그가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한 그 화장실 안에서 공무원들이 어쩜 가장 일사불란했는지도 모르겠어. 가끔씩 죽음 앞에서조차 '책임감'을 떠올리는 건 순전히 야만적 세상일 뿐인데.
가장 비열한 단어 중 '형평성'이란 게 또 있어, 저마다 공정한 세상을 부르짖지만 세상에 과연 공정한 세상이 있긴 할까?
자존심
어느날강가에앉은윤슬의반짝거림을
남몰래지켜보다가불쑥눈물이솟을때
세월의하수상함도내곁을떠난친구도
아무말이없고긴침묵을지탱해온것은
철저한고독이거나비겁함이었을텐데
이호선차창에낀국회의사당옆을스쳐
한강을건너는아침햇빛이너무찬란해
눈도부셨지차마뜰수가없었어하지만
머릿속에쓰다만연필자국은계속남아
지우고또윤색한추억마냥빛나고있어
그걸깨우치는동안말없이떠났던이들
전화번호부를뒤져봐도없게된이름들
또어디선가불쑥나타나놀랄일있을까
하며만남을주저한시간을조롱하겠지
봄날, 그들도 우리처럼
별안간 내게 찾아온 넌 잠시 서성대다가 이렇게 불쑥 물었었지 선배, 시를 왜 꼭 써야만 하나요 청명하기만 한 네 눈동자들을 슬쩍 피해 술잔을 기울이던 내가 답했어 다른 건 할 줄 몰라서
그렇게 우린 연애를 시작했어
M.T.를 함께 갔던 그해 봄의 용문산에서도 천년의 은행나무는 건재하기만 했었는데 밤새 술에 취한 네가 중얼거리던 거, 기억해?
진달래와 철쭉,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개나리와 산수유를 자꾸 혼동하기만 해 나무들의 줄기부터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었지
그렇게 온갖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봄철에는 엉겅퀴며 쑥갓이며 민들레와 하얀 목련 또 제비꽃과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라일락들까지도 피었을까 온통 꽃밭이었나 모르겠어
나무들도 많았었는데 파릇하게 싹이 돋는 광경들이 참 예뻤는데, 그치?
한 싯구를 내게 펼쳐주던 그때, 그 "눈물지으며 웃어주던 들꽃처럼" 내 시들이 과연 예뻤을까 싶어 그렇게 살고도 싶었는데
시골에서 자란 네 가정사와 도시에서 자란 내 가정사는 불우하게도 번번이 물리적 충돌을 불사했고 때때금 디보스닷넷을 뒤적여가며 보낸 세월도 있었지
그렇게 우린 이혼을 한 것 뿐이야
함께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던 가정법원 앞 길목에서 그와도 마주쳤었지 현실적이기만 한 그 길가에도 포플러 나무들이 우람하기만 했고 도시의 매연을 한껏 집어삼켰잖아?
술이란 술은 모두 다 마셔본 적 있었지 서로 다른 이름을 갖는 녹색병들과 갈색병들과 투명한 병들과 PET병들을 잔뜩 모아서 술을 마시곤 했어 그렇게 병에 걸린 것 같았어
술로도 모자라서 밥만 잔뜩 먹곤 했던 것 같아 황지우가 썼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도 그토록 무참하게만 깨졌었는데, 넌 모르겠지?
위자료를 입금하라며 통장번호가 적힌 쪽지를 내게 건네주던 그때, 그 쪽지의 가장자리에 적힌 "사랑해"라는 말이 너무 낯설었어 내 시들도 과연 밥이 되어줄까 싶어 그렇게 사랑하고도 싶었는데
시골에서 자랐던 네 들꽃과 도시에서 자란 내 나무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위로해줄 차례였고 또 다시 만나지 말자며 깊은 약속을 했었지
- 그때 네가 했던 말들에 관한 추억 ;
난 그렇게 생각해
어차피 선배도 알잖아 치열한 시간이 뭍에 오르게 되면 지독한 현실이 먼저인 거야 이제 뗏목놀음은 끝내고파 이 연극도 이젠 지겨워졌어 대학로는 아직도 좋아 은행나무도 마로니에도 아직 괜찮아 근데 돈은 못 벌잖아 어때 하지만 집도 사야 하고 애도 낳고 평생 배우로만 살 순 없잖아
그게 문제야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어 근데 아직도 망망대해야 어딘가에 스스로 정착 못하는 게 느껴져 엄마처럼 되려나 봐 후회가 들어 아니다 싶고 그래 변했어 변했나 봐 아빠가 나더러 미친년이래 이렇게 살 순 없어 솔직히 내가 너무 비참해 밤새 울었어 이젠 좀 행복하고 싶어
행복이 뭔데
뭘 잘 생각한 거야 이건 변하지 않아 포기야 내 인생도 연극과 마찬가지라고 봐 포기하고 살면 사는 건가 젊은것도 아니야 현실이 너무 무서워 그래 조로증일 뿐야
봄날, 연작
- 그리움에 관한 것들 :
때때금 잊고 지낸 이름 밤늦게 불쑥 꺼내보면 더는 못 본 얼굴, 그 말투, 고된 표정들 아스라해 적막할 뿐
무덤덤히 달력을 넘기는 동안 이불속 바늘을 찾듯 조심스레 살펴온 기억들은 차례로 고독히 쌓여, 더는 위험하지 않아, 착각하며 계속 높게만 쌓였던 그것들 문드러지고 닳아 이젠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든 핏빛 멍울로도 남았고
누군가 또다시 호출할 적마다 섬칫 놀라며 이내 덮는 일기장처럼 내게도 그 시절의 치부라는 게 생겼을까
언젠가 부끄럽지 않도록 그 멍울 주위를 한참 들여다본 적 있었지 후회는 없어, 그 시절만이 답해줄 수 있는 무엇, 아껴둔 채 다시 천천히 지워야 해, 꾹꾹 눌러쓴 자국 위에 다시 연필촉으로만 남는 이름들
더는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생경한 빛깔의 붕대만 진작 손에 쥔 채 전화는 또다시 부재중
처음,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어
후드득후드득 검정 우산 속에서 한참 비를 맞았어
어느 봄날, 화사한 연분홍 벚나무 아래 지던 꽃잎처럼 웃던 너 한참 자전거를 탄 게 기억났어 모든 풍경을 반사하던 물빛이 네 얼굴에 스칠 때 그만 고개를 돌렸는데, 며칠 전 아침엔 혼자 조그만 고래의 몸짓을 한참 쳐다봤어 내 얼굴이 비치던 물빛
사람들은 쉽게 종이를 찢곤 해 차마 종이에 적지 못했던 말을 전화기에 대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훔쳐 읽었어, 아무 말이 없었던 몇 초의 침묵은 시계를 정지시켰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어
봄비는 평등해, 모든 사람들이 비를 맞잖아
하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어 평등은 좌파적 발상이라며 금기로 만든 시간들 어느새 죄책감으로 이만큼 쌓여 있어, 도무지 기억도 못할 세월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 평등은 아름다운 건데 아름답지가 못했어
평등을 비웃던 사람들도 이젠 더 이상 집회를 열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 잠시만 보아달라며 외치던 함성은 마치 초등학생들 같아 유치해졌어, 확성기가 모든 목소리를 대체한 시대
21세기의 봄비가 왜 평등해야 하냐며 따져 묻던 네게
지금 내리는 이 비도 불평등해야 할까를 되묻는 나는
비를 기다리던 우산장수와 선인장을 걱정하던 꽃장수를 애도하며
오늘도 한참 비를 맞고 있어 비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
그래, 혼자 또 자전거를 탔어
그날도 화사한 벚꽃이 하나둘 지던 날, 아침부터 와락 안았던 눈물
희뿌연 시야, 구불구불한 도로, 미끄러지듯 자전거를 타다 이젠 그만 타고 싶어졌어
그래서 넘어졌어
그만 보고싶어서
두번, 기다리지 않는 시간은
그 여름, 외딴 연못가와 심드렁히 나누던 얘기를 불쑥 기억해냈어
군복을 입던 그와 군복을 싫어했던 내 얘기도 덩달아 했던 기억이
연못에 둥둥 떠다니던 詩를 봤어 두툼한 한지 위에 씌어진 글귀들
그렇게 둥둥 떠다니던 물 위로 반짝이며 고였던 눈물도 기억했어
서늘한 바람 하나 없던, 무더웠던 그늘 밑 연신 발그레하던 얼굴
때때로 사람들이 철 지난 노래를 더는 떠올리지 말자며 얘기를 해
요즘 노래가 얼마나 좋은데, 뉴진스는 곧 빌보드 1위도 한다는데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탈 줄은 다들 몰랐으면서 문학도 아니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은 제목부터가 '시적'이잖아, 또 말을 해
문학이 대체 뭔데? 하며 묻던 내 말투는 다분히 공격적이기만 해
뭘 자꾸 묻냐며 다시 입을 닫던, 네 詩을 읽었던 가을의 기억들도
다시 봄이 오면 그 연못가가 문득 생각나서 자전거를 타고 달렸어
또 넘어졌어, 무릎이 까지고 피도 뚝뚝 흘렸어 그래도 계속 달려
다시 연못가에 다다르면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 그곳,
조용히 세월 밑으로 흐르고
세번, 저무는 강가에서
한 시대가 저무는 소리가 들렸어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이 타임캡슐로 들어간다던 뉴스도 벌써 20년이 지났고
스마트폰이 점령한 지구는 자전거보다 더 빨라 이젠 자동차를 추월하고
화석연료를 벗어던지지 못해 아직도 매연이 자욱하고
털 빠진 개들이 웅웅대던 골목 어귀, 다닥다닥 붙던 포스터들도 철 지난 유행
그렇게 어수선히 한 시대가 저무는 소리를 듣고 있어
대학로 연극들이 자본주의를 논하던 와중에도 굶주려 죽는 배우가 생겨났고
예술가들한테 기본소득을 주자던 주장은 헛된 공산주의자의 포퓰리즘이라며
연봉 1억이 넘는다던 은행들마다 구조조정에 온 힘을 다하는 2023년의 여름,
챗GPT가 시인들의 자리를 대체하고 학생들이 작문 과외를 단톡방에서 받고
무료잖아, 시도 이제 무료가 될 거야, 호기롭게 떠든 한 중년의 신사도 떠났고
연봉 2천만원도 안될 시집이 국내 최고 베스트셀러가 됐고 강연회를 연 여름
저무는 강가에 이는 바람
흩날리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노래를 부르는 듯 네 목소리가 들려
난 그만 또다시 눈을 감았지
서늘하지 않은 바람이 훅 불었지
네번, 지난해의 봄비를 맞다
전화벨이 울렸고
여보세요
말이 없었지
번호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웬 침묵이냐
나도 말이 없고 없어졌지
그렇게 1분
뚝 끊어졌어
가슴이 뻐근해 눈물이 돋았어
다섯 연, 연관과 질서에 관한 답
그해 여름, 오랜 장마의 끝
그대랑 단둘이 거닐던 고성 바닷가 절벽에서 언뜻 무지개를 바라보았지 넘실대는 파도, 찬연하기만 했던 오색빛 사이로 희미하게 푸르던 전운, 그걸 감싸 안아보려 했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기억을 묻던 이가 없었는데 남몰래 적던 일기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름, 누구지, 하면서도 내내 지나쳤던 모양인데 기억을 망각한 사이에 스치듯 지나친 순간들도 많았는데
포연이 수북이 쌓인 서울
무참히 폐허가 된 도시는 진작 떠났어야 할 곳인지 몰라 내내 그대만을 기다렸나 봐 아득해진 머리 위로 또다시 비행기 몇 대, 포차들이 요란스럽게 이동하고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세월이 흐른 동안만큼
아무도 이 전쟁을 믿지 않았었는데 매일 떠들던 뉴스들도, 각종 전문가들도, 하다못해 시인들까지도 애써 외면한 결과인데 입시와 마약과 야당과의 부질없는 전쟁만을 일삼았는데
연관과 질서는 그때, 이미
권태와 속단을 금기시하려 만든 십계명이었나 몰라 때때로 궁핍한 육신들이 찾던 예배당 옆 배식대에서 나란히 줄을 섰다가도 이내 배를 채우면 냅다 도망치기만 한 그것들도 어쩌면 희망이었을까
연민과 질정은 늘 곁에 있었는데,
견뎌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
여섯군데, 다시 전철역 앞에서
4월의 섭씨 28도는 대체 무슨 일이냐며 땡볕 속 대로변을 걸었고 건물 입구에 즐비한 노점상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줄기는 이내 그늘을 향해 숨었고, 지나치는 차들의 경적소리도 어젯밤의 높은 목청처럼 망각이 된 채 저만치 사라졌고
( 빈 연을 채우시오* )
메마른 얼굴 위로 눈부신 화장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면 때마침 열차가 등장하곤 했고 스르르 열리는 스크린 도어 RH 8분 간격의 상영시간은 그저 촉박할 뿐이기에 다들 바삐 관람석을 향해 뛰기 시작하고
이윽고 출발하는 서울행 비둘기호
예수님을 믿으세요, 이른 아침부터 크게 혼잣말을 연신 중얼거리는 주연배우는 독백인가 방백인가, 관객들의 표정은 심드렁한 채 저마다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을 향해 기도하는 시간 예수님이 설령 있어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풍경
* 간밤에 나눴던 통화를 잊어보고자 걸음들은 바삐 골목으로 사라졌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다시 나타나는 모퉁이, 기억과 망각 사이의 경계, 그 경계를 지나칠 적마다 한 살씩 나이를 더 먹었는가 봐
일곱번째 비, 곡우
청명과 입하 사이
청명하기만 한 하늘이 여름을 향하고
봄날은 시나브로 절정을 향해 치닫는
그 밤, 문득 비가 내렸지
잊혀진 노랫말처럼 구슬픈 가락으로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지는 협화음,
그 그리움이 맞던 봄날
우산을 쓰지도 않은 까치가 날아올라
후두둑 빗물을 털어낸 나뭇가지에도
벚꽃이 쓴 편지를 건네는 라일락처럼
그윽한 향, 봄비에 스며들고
이별은 연습할수록 재미도 있겠지만
봄비는 맞을수록 치명적이기만 해서
곡우, 애써 피하며 걷고 있는 아침에
여드레 동안, 오월
불안과 미래는 자웅동체라고
자잘한 일상이 외면한 것들은
사월이 잔인한 달이야? 그러면
오월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슬로우 록이라고 12분 음표 세대
황인찬 시가 백자를 닮았단 서평에
5천원짜리 흰 요강이네 친구가 웃고
관조의 아킬레스건이 허무개그일까?
요강보단 더 나은 시를 써야지 했는데
( 빈 연을 채우시오* )
하물며 출근하는 전철 안 뉴스
도무지 정체 모를 도덕, 진실
가십거리가 된 채 속삭이고
시답지 않은 시, 쓰겠다고
애꿎은 스마트폰만 끄적
정동진 일출 사진 한 장
감상하세요, 오월엔
눈이 시리게 맑은
샘물이 고이는
안목의 그늘
달항아리
* 생각해 보니,
시대정신이라는 낱말, 너무 어려워
그래서 자잘한 일상들만 빼곡한데
불안한 미래는 좀체 대답을 않고
이마엔 나이테들만 깊게 파이고
아홉 번을 봄, 책으로 쌓은 탑
GPT4가 분당 이천 타를 넘어선 올해, 소설 생산량이 역대최고치를 기록했고 누군가는 말했지 곧 작가들이 멸망할 거라며 혹은 읽어봤겠지 아직 걱정할 수준이 아니라며
한 비평가에게 따져 물었어 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한다는 말이죠 사상, 감정, 교감 같은 걸 로봇이 하나요? 나직이 속삭이듯 그에게 던진 말이 그새 부메랑이 돼 내 발등을 스치고
제너레이팅은 더 이상 작가가 아니야, 로봇의 생산성이 월등하게 더 높잖아 이윽고 수천 수만 권의 책들이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고
아직 퇴고가 남았어, 한 작가가 퉁명스레 내뱉는데
벌써 비평을 시작한 GPT4는 웃으며 평론집을 건넨다 봐, 알레고리는 결국 딜레마였지 미래파를 이긴 사조는 로봇이 됐잖아 훨씬 건조하고 영원해 그치?
미래파가 문제였구나, 아뿔싸, 하는 순간에도 로봇이 쏟아낸 김소월과 윤동주가 슬며시 또 웃는데 끔찍해, 싫어, 자동차를 조립하던 로봇한텐 거부감이 안 들잖아
알튀세르와 그람시가 했던 말들도 다 소용없어졌어 벤야민이 낫겠지? 정치적이어야만 돼, 왜 국산은 없는 거여 그게 문제여 한 충청도 선비도 따라 웃었고
아직 편집이 남았잖아, 편집이 곧 퇴고지 뭘
로봇을 이겨보겠다는 발상부터가 이미 바벨탑인 걸까, 자본의 힘은 이토록 막강하고 두렵고 몰염치한 걸까
굶어죽겠네... 기본소득이라도 내놔
열 번의,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폭염
오월의 중순을 흩뿌린 녹음이 벌써 그늘을 만들고, 후드득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데,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문밖에 잠시 서있는 동안은 그 말을 중얼거렸나
엘리베이터
퀴퀴한 냄새가 아직 덜 빠진 좁은 방안에 세 명이 나란히 섰고 한 명은 메신저를 또 하나는 동영상을 쳐다보고 귓속에 살랑대는 전주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이 밤
왠지 그대가 남긴 술잔에도 이슬이 맺힐 것 같아 식탁 위에 둔 걸 기억해냈어 아직도 안녕한가를 묻고
그저
그렇게 설렘이 진 얼굴엔 지친 일상이 또아리를 틀었고, 마지막 버튼이 울리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고 한 명은 핸드폰을 이내 덮고 내렸고 또 하나는 동영상이 여전히 시끄러울 뿐
사랑은
현관문을 열고 캄캄한 방안을 파고드는데 창밖에 내리는 비도 유리창에 방울방울 영글고 그 뽀얀 입김을 기다렸을까 종일을 아렸던 가슴에서 내놓는 눈물도 이내
빗물 같아요*
* 1989년, 전영록 작곡
- 모자이크, 다짐의 지평선 :
때로는 다짐도 하건만*
사랑의 미로 같은 세월 속에도
자전거 한대, 낡은 상징이었지
오월의 삼십 도가 무르익을 때
바람 부는 한강변을 산책하고파
바람이 없다면 가지 말아야 해
그게 더 좋겠어
다시 전철 안
빼곡한 사람들한테 쏟아진 햇빛
축복보다는 재앙에 가까운 체제
그 체제의 밝음, 도 기억해 둬
곧 소멸할 테니까
전철 위로 불쑥 솟는 지평선*
금세 컴컴해지는 동굴 속
편지에서 진주가 돋아
기억을 꺼내봤어
사랑한다고
* 1984년과 2023년 사이
봄날, 다행이다
오후, 입하를 목전에 둔 날씨
낡은 도서관 공사장을 지나 서고 앞에 서면
언제 있었냐는 듯 예전 시집들 온데간데없어
한참을 서고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득 족보를 모아둔 서고에 눈길이 갔고
족보들 옆 살짝 끼워둔 시집 한 권, 황지우다.
누군가 일부러 꽂았거나 그새 까먹었나 봐?
잘 됐다 싶어 그 시집을 빌렸다.
다행이다.
오월의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도서관 옆 등나무 벤치를 지나치며
한 무리의 여성들 앉아 생긋 웃으며
나누던 대화, 우연히 듣게 된다.
"폭력적인 남자들이 원래 실컷 때려놓고
나중에 미안하다잖아... ㅎㅎㅎ"
가만히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밤새 날 흠씬 두들겨 팬 아내는
오늘 점심까지도 미안하단 말이 없는데,
그렇다면 폭력적인 아내는 아니란 뜻이네?
다행이다.
걷는 내내 뱃속 바람 빠지는 소리, 난다.
- 아내한텐 절대 보여주지 말아야지.
봄날, 인구분포
90대, 일제시대 신탁통치
80대, 전쟁세대 멸공방첩 새마을운동
70대, 한글세대 노인빈곤율 세계1위 사상계
60대, 베이비붐 부익부빈익빈 부동산 창작과비평
50대, 386 올림픽 사회주의 붕괴 문학동네 씨네21
40대, 인터넷 IMF 서태지 월드컵 싸이월드
30대, SNS 이혼율 세계1위 각자도생
20대, 백수 절망 인스타 BTS
10대, 입시 과외 밈 뉴진스
이하, 희망 해외여행
―――――――― 5% ―――――――― 10%
* 출처 : 통계청, 2023
봄날, 비와 당신의 이야기
한나절을 걸어온 길, 비에 잠긴 보도블럭 위 군데군데 패인 흔적들을 피해 한참을 걷다보면 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의 흔적을 지우며 걷는 얼굴에도 꽃내음이 일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던 그 길가에도 연분홍 꽃잎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고 빗방울을 머금은 채 우리를 쳐다보던 적 있었죠. 무엇에 놀란 표정을 닮아간 채 당신의 말 한마디에도 얼굴이 붉곤 했는데, 이런 비는 처음이야 하면서도 얼굴은 푸르기만 한 채 더는 붉어지지 않습니다.
때때로 이별만큼 익숙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만날 적마다 꽃구경을 다녔던 게 기억났어요. 튤립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공릉천 옆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 걷던 얼굴에도 꽃내음이 가득하곤 했습니다. 그 생각이 났을 뿐예요.
( 빈 연을 채우시오* )
혼자서 걷는 이 길이 참 좋았습니다. 내일 또 누군가랑 함께 걸어야지 설렘만이 가득했던 밤, 그 기억을 떠올리며 금세 얼굴은 붉어지고 가슴은 또 꽃내음을 벅벅 지워댑니다. 그게 아플 뿐예요.
한나절을 걸었던 길, 이제 비가 그치고 건널목에는 웅덩이가 새로 생겼습니다. 웅덩이 옆에 잠시 주저앉아 꽃잎들이 둥둥 떠 있는 수면 위를 바라봅니다. 비애, 환멸, 그리움 같은 이름들이 적힌 꽃잎들이 하나둘씩 침잠할 때면 이윽고 가슴이 멎습니다.
봄날의 빗소리도 함께 잦아듭니다.
* 예를 들어,
얼마전에 이사를 온 옆집 총각이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네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 그해 봄, 신호등 밑에서 온갖 비명과 함께 잠들던 당신의 눈빛을 떠올렸습니다. 어서, 어서요, 애타던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함께 넘어진 자전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었는데, 그때 그 자전거였나 봅니다.
2036년 수요일, 그 거리에서
뜨거운 증기가 솟구치던 저녁
팔꿈치가 헤진 바람에 수선을 해
평소보다 꽤 늦어버린 퇴근길
마스크를 쓴 사람들 바삐 오가고
에어컨 소리만 웅웅대는 플랫폼
우연히 동기 동창인 널 만났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 바삐 오가고
에어컨 소리만 웅웅대는 플랫폼
우연히 동기 동창인 널 만났고
한쪽 눈을 잃은 너도 피해자였고
열차가 이윽고 혜화역에 이르러
함께 연극 보러 가자며 졸랐고
그렇게 우린 봄날을 잃었을까…
무대 위 배우들도 눈을 잃곤 해
가끔 계단에 부딪쳐 넘어지잖아
예전엔 크게 웃고 했는데, 맞지?
한 막이 끝나자마자 또 나가자며
40년전 극본의 리메이크를 끊고
단열헬멧를 쓴 채 펍으로 향했고
가볍던 맥주 한잔에도 눈이 붓고
하마터면 집에 가자 하고 싶었고
십삼년만이다 맞지, 그녀가 묻고
함께 여관에서 보냈던 그해의 밤
소리없이 울던 네게 장미 한송이
수요일 밤이었으니까, 맞았고
수요일 밤인데 더는 묻지 않았고
더는 장미가 살지 않는 이곳에서
술잔 속, 너도 웃었고 나도 울고
― 노랠 불러줘, 나와 같다면, 꼭?
― 40년전 노래를, 십삼년전에도
― 어떤 약속도, 없는 그런 날엔…
그렇게 헤어진 수요일 밤,
더 이상 해는 뜨지 않았고
시커먼 구름 속 후회만 해
그대여, 나와 같다면
내 마음과 똑같다면…
마리의 일상
마리는 우리집 개 이름
마리는 하얀 스피츠
마리는 동물
네발을 가졌고 꼬리가 있고
검은 눈을 가졌고
고기를 보면 달라며 보채는
간식을 주면 좋아하는
마리는 우리집 개 이름
마리는 하얀 스피츠
마리는 식물
뿌리를 가졌고 눈물이 있고
바깥을 쳐다보며 지내는
산책을 하면 좋아하는
마리가 시를 쓴다
마리가 퇴고를 했고
우체국으로 가서 등기우편을 부치고
낮술을 마신 채 잠들었다
도로 깨어나니 벌써 저녁
마리는 이불 속에서 잠이 든다
마리는 우리집 개 이름
마리는 하얀 스피츠
마리는 광물
빛나는 보석
착하디 착한 우리 마리야
이제 너도 나이가 들었구나
뜀박질은 조심해야 돼
관절을 보호해야 돼
마리는 더 이상 강아지가 아닌
우리집 강아지
마리는 더 이상 배고프지 않은
토실토실 알밤 같은 몸매
마리야, 산책, 갈까?
봄날, 마지막 휴일
덧없다
사랑도 미련도 이별도 모두 시든 꽃처럼
여름을 견뎌낼 식물은 오직 풀이란 사실
오늘이 가장 예쁠 때야
가장 큰 착각은
여태까지 최악이었을 경험은 곧
다음 차례의 경험에 그 자리를 내어주기 십상이라는 사실
살면서 때때금 힘들다는 건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
입시와 입대와 졸업과 면접과 승진과 결혼과 출산 그리고
탈락과 가출과 이혼과 해고와 장례 또 질병과 막막함
오늘이 가장 예쁠 때야
뚱뚱해진 배를 만지며 한사코 사진을 거부했더니
내 친구가 웃으며 한 말
오월의 여름, 부고
고모께서 돌아가셨다, 일을 하다 말고 서둘러 낙향하는 KTX 열차 안 물끄러미 들녘을 바라본다 신록이라는 단어도 생각났다, 모든 소멸하는 것 다음에 꼭 이루어진다는 그 새로움의 끝, 머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
지평선을 삼는 얕은 능선까지 한없이 펼쳐진 푸른 대지를 품고 그에게 전화를 건다 잘 지냈나요, 잘 지냈다고 한다 안부는 때때로 애처롭다 상대편이 받아줄 용의가 없어서, 외로워지는 법을 다들 잘 안다
대전역 광장, 인스타에서 포토존이 된 구역을 잠시 서성거린다 무얼 전역했다는 걸까, 고작 두해짜리 복무를 마쳤다는 걸 자랑해도 될까 인생이라는 복무기간은 앞으로도 백년 가까이 더 남을 텐데
이별이 훨씬 더 남았는데
저녁 무렵에 도착한 장례식장은 울음바다 왔구나, 한마디면 모든 게 프리패스가 되는 풍경 속 기어코 국밥 한 그릇을 먹다 말고 몇달 전 고모의 얼굴을 기억해낸다 그렇게 소주 한병을 비운다
돌아가셨다는 것보다 다신 볼 수 없어서 슬퍼
아버지를 회상하며 친구가 한 말이 떠오르고
내 그리움도 쉽게 저물게 될까를 묻고
그 익숙함만큼 늙어감도 이미 잘 알고
술기운이 채 가시지 걸음으로 터벅터벅 귀가를 한다, 밤 열차 안 쏜살같이 가로등이 스치고 오월이 저물었다는 안부도 문득 생각났고, 모든 오월의 끝엔 꼭 소멸하는 그리움이 있었음을 알고
봄날이 있었음도 이미 잘 알고
다가오는 유월을 이미 잘 알고
때 이른 장마
유난히 덥던 오월, 끝내 하늘이 쏟아져 내려
초파일의 빗줄기를 피해 처마에 숨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장마인가
처마 밑에서 오은의 시를 본다
사월에는 눈이 오고 오월은 폭염,
충분치 않은 계절의 순간들만 너무 설렜나
조바심을 내봐도 달력의 숫자들은 어김이 없고
다가올 유월은 역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이어야 하고
그래서 장마는 벌써 오지 않는다
그래, 기압골이 좀 불안한가 봐
누리호 발사도 성공했고 정권은 안전해
혼자 중얼거리는 부처님 오신날의 봄비
오월의 마지막 초저녁을 찬미하는 노래
새색시 시집가듯 요란스럽기만 한 박자
내일도 비가 계속 오려나?
반팔 티셔츠도 이미 다 젖었는데
이제 유월인데, 아스팔트가 익을 여름…
동태의 안부
알, 애, 곤이를 한가득씩 넣고
미나리, 쑥갓, 무랑 함께 끓이면
모양도 맛도 그야말로 일품이었지
다섯살 때부터 먹었던 동태눈깔
그 진주색 작은 구슬은 왜 먹었을까
이젠 희귀해졌는데
좋아하는 음식들도 가지가지인데
노가리며 북어, 코다리, 황태는 한가족
아빠며 엄마며 딸, 아들 구별도 없이
십년만에 화정역 앞 동태탕을 끓여
시흥에서 종로3가를 거쳐 겨우 당도한
친구들과 함께 먹는다
러시아해를 거쳐 일본인들한테 잡혀
겨우겨우 술상 위에 놓인 여정이
한 세기가 저물었음도 알려
어쩌면 더는
노가리며 북어, 코다리, 황태도 못 먹고
이별을 고해야만 할 시대
동해바다에서 잡히던 명태들이 좋아
얼리지 않아도 동태탕이라 부른
이 놈의 미련, 왜 또 질겨
명태들아,
동태들아,
생태들아, 안녕하냐
등 굽으면 안돼
곧 구하마
버텨 봐
* 정부 측 시찰단이 후쿠시마 오염수 무단방류를 선포한 일본에서 귀국했다는 2023년 오월의 마지막 주말
내게 문 열어주던 그녀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
이내 큰 소리로 샤워가 쏟아져
흠뻑 젖은 채 막혔던 버스 안
내 옆에 선 그녀, 불쑥 꺼내던
여관에 갈래 샤워, 하고 싶어
조바심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만, 말했던
다 젖었는데 또 샤워, 한 인어
이내 큰 소리로 코 골며 잤던
인어 옆에 누웠던 나도
발 밑에 지느러미가 돋아서
더 깊게, 날 안고 흐느끼던 밤
경의선
비 오는 날엔 혼자서 경의선을 타곤 했다
멍하니 플랫폼에 서 있다 보면, 너른 들판
푸른 보리가 익는 동안에도 고구마 파종이 분주했고
삼십육도를 넘은 오월도 곧 사십도를 넘겠다고 했다
수도권 한복판을 가로질러서 온 이방의 낯선 사내들
알 수 없는 단어들로 한참을 서로 얘기하다 침묵하고
신도시 사람들이 비아냥대봐도 어김없이 불쑥 솟는
초고층 주상복합들이 전철역마다 온통 섬처럼 잇고
한 도시의 쇠락을 거대한 난개발이 대체하는 과정을
아주 천천히 그래도 이토록 철저히 목격하는 중이다
초등학생 시절을 다녔던 길도, 이름만 남은 추억들도
짐짝이 된 복선전철을 타고 함께 파주로 향하곤 했다
슬그머니 창가에 서 있다 보면, 푸른 들녘
쏜살같이 멀어지는 지평선 끄트머리 북한산도 보여
아 참, 여기도 남한 땅이지 하며 불쑥 깨닫기도 했고
무명의 아파트들과 지은지 얼마 안된 공장 건물 사이
행색마저 생경한 아가씨들도 금세 저만치 사라졌고
먼발치 임진강을 향해 흐르는 한강의 굽이굽이마다
드문드문 펼쳐지는 낯선 풍경들만 새롭게 그리곤 해
한 도시의 그리움을 또 낯설음으로 대체하는 과정도
한차례 더 아주 천천히 그래도 철저히 목격하곤 했다
이윽고 닿은 종점역, 한 무리의 국방색들
금방 물 튀기며 달아난 버스한테 욕이 한바가지였고
아 참, 여기가 전방이지 하며 불쑥 또 깨닫기도 했고
무리를 피해 숨은 골목길에서 삼십 년도 더 된 옛 노래
삼십 년도 더 된 티셔츠를 입은 옛 사람도 흘러나왔고
서로의 눈길을 피해 발걸음만 교차하던, 그 골목 어귀
다시 혼자서 부대찌개랑 소주 한병을 채우는 동안
짧았던 해도 술 취한 듯 구름 속에 숨었다
오월의 마지막 비
출근하기 직전
북한이 우주발사체를 쐈다고 해
서울시 공습경보가 울렸고
또 어떤 이는 서울만 챙겨주냐며
부동산 활성화 대책만 꺼냈고
아는만큼만 보이는 진실은
늘 소통의 심각한 부재를 알렸고
출근을 서두르는 아침
경보가 울렸든 말든 서두르는데
다가오는 빗소식이 더 궁금했고
섭씨 사십도를 넘겠다던 여름이
이제 한발짝 더 다가오려는 모양
사흘 연휴를 꼬박 내렸던 비가
슬그머니 웃고 구름들을 모으고
유월의 찬란한 태양마저 위협해
차창 밖 매캐한 공기가 어둑하고
오천원짜리 투명우산이 비상구요
오천원이면 살 수 있는 게 다행인
대돈민국 소울시의 마지막 아침
카카오톡
- 오빠, 그거 알아?
- 뭔데?
- 북한이 아침에 로켓 쏘아올렸다잖아? 그거 서울만 문자 보냈대
- 오빠도 얼른 서울로 입성해
- ……
- 미친놈들 아녀? 전쟁 일으키고 싶어 환장한 애들 같아
- ……
- 오빠, 그거 알아?
- 또 뭔데?
- 어제 어떤 남자가 나한테 전화번호 물어봤어
- 그래서?
- 안 알려줬지 ㅋㅋ
- 잘했어 요즘 세상 무서워
- 알어 내가 잘 알아서 해 아닥
- ……
- 오빠 ㅋㅋ 또 그거 알아?
- 또 뭔데? ㅎㅎ
-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니까 단톡방이 온통 난리난 거 있지 다들 북한 쳐들어온다고 편의점 알바하던 학생이 통조림 7만원어치를 샀대 ㅋㅋ
- 전쟁이 그리 쉽게 나남?
- 그러게
- 몇시까지 출근이야?
- 9시 반
- 도착했겠네
- 거의
- 즐건 하루
- Thanks
간밤에 ‘미래파’ 시를 한참 욕하고선 아침부터 밋밋하게 요란스럽지도 않을 북한 소식을 믿고 또 한줄 시를 쓴다 최대한 거리를 두고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 마치 한 그릇의 요강을 닮은 시를 또 썼다 이렇게 쓰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안 쓸 이유도 없지 않은가? 하며 또 쓴다
재미가 없다 감동도 없다 그저 말장난 뿐인 이걸 의미있다고 추켜세운 작자들이 영 이해하기 힘들다 말장난을 할 거면 뭣하러 시를 쓰냐? 되묻고도 싶었지만 참았다 밤이 너무 늦어서다 실은 대화가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은지
- 밥 먹었어
- 잘했어
- 늦게 잤다면서? 뭐했는데
- 단톡방에서 떠들었음
- 그게 모야 그런거 하지 마
- ㅎㅎ
- 미래파라고… 희한한 조류가 있어 한참 깠어
- 조류? 새 종류야?
- ㅎㅎㅎ
- 어 맞어
- 시조새가 좋더만
- 시조새는 아니고 음… 무슨 딱다구리 종류야 쉴 새 없이 딱딱거리는데 들을만하진 않지
- 그럼 듣지 마
- 안 팔려 ㅎㅎ
- ㅋㅋ
- 그럴 줄 알았음
- 오빠, 박노해 알아?
- 잘 알지
- 박노해 시집이 백만부 넘게 팔렸다던데?
- 응 맞아
- 그 시절이니까 그래?
- 아니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관심이 많은 주제를 풀어 썼잖아
- 그럼 요즘 시들은 왜 그래?
- 그러게… 뭐하는지 모르겠음
- 이게 자세히 보면 이미 대중예술이 시를 거의 대체해버려서 그런 듯 그러니까 시들은 점점 입지가 좁아져서 아예 추상미술처럼 자기들만의 세계로 갇혀버린 듯해
- 그럼 더 안 읽지
- 맞아 그래서 더 안 읽어
- 난 김수영문학상을 RM이 탔으면 좋겠어 RM 가사가 제일 맘에 들어
- 나도 그리 생각해
- 어렵게 쓰면 지들이 잘 쓴 줄 알아 바보들 아님?
- 세상 최고 바보들이다 맞아
이제니의 시를 꺼낸다 15수만에 등단을 했다는데 맞나? 수천 편의 습작을 이미 갖췄기 때문일 거야 스스로 그리 판단해놓고 사람들한테도 그리 말했었지 어떤 이가 이제니는 자폐증 같은 게 있다는 소문을 흘렸는데 그저 눈 감고 지나쳤다 김수영 시인 말처럼 사소한 일로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단 한 편의 연시를 쓴다면 그녀한테 보여준다면 누구의 시를 보여줘야 할까? 잠시 곰곰히 생각해봤다 없다 마땅치가 못해 패션에 잔뜩 신경을 쓴 황인찬의 인터뷰 생각도 나고 빼어난 미모로 유튜브에 나타났던 재작년 신춘문예 당선자의 사춘기 여학생 같은 배시시 웃음도 기억이 났고
- 인공지능이 난 좋아
- 무슨 연유로?
- 사람들이 다 평등해지잖아 다들 멍청해질 수 있잖아
- ㅎㅎ
- 제 잘났다고 떠들던 사람들 다 필요없어 인공지능이 더 똑똑해
- 과연 그럴까?
- 기술 발전을 전혀 이해 못하는 작자들이 더 큰 문제야
- 그건 맞지
- GPT4가 나오려면 불과 1년밖에 안 걸렸어 다음 세대는 더 빨리 나올 거야 머지 않았어
- 음…
- 인공지능한테 일 다 시키고 우린 놀면 되잖아 ㅋㅋ
- 과연 놀게 놔둘꼬? 난 안 그럴 것 같은디…
- 그럼 뭘 시켜? 멍청한 것들한테
- 그냥 잡담? 소일? 무노동 기본소득?
- 좋네 ㅋㅋ
- 소수의 알고리즘이 다수의 무지함을 지배했을 때, 기가 막힌다
- 매트릭스지 뭐
- 좋다고 다들 AI 공부한대 지들 머리로 되나 ㅋㅋ
- 쓸 줄 아는 것과 쓸 줄 모르는 것의 차이는 엄청난 거야 인터넷도 자동차도 그렇잖아
- 맞어 그 정도가 되겠지
-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될 걸? 이건 거의 원시인과 21세기 인류의 지능 대결 수준이니…
- 오빤 작가가 될 수 있겠어?
- 작가라는 직업이 바뀌지 않을까?
- 어떻게?
- 음… 편집만이 살아남는다고 봐 창작은 로봇이 더 잘하니까
- 로봇은 편집을 못해?
- 아니 편집도 잘해 ㅎㅎㅎ
- 그럼 머야 ㅋㅋ
- 편집이 곧 퇴고잖아 퇴고는 일종의 정치행위야 로봇이 못하는 일임
- 그래? 그럼 로봇들은 모두 비정치적이네
- 알고리즘 스스로 그리 주장해 물론 거짓말 ㅎㅎ
- 모야 ㅋㅋ
- 회의할 시간이네 다음에
- (손을 흔든다)
- (시를 보여준다)
- 오빠가 쓴 거야?
- 어…
- 좋네
- Thanks
- 왜 맨날 땡쓰 ㅋ
- 고맙다는 우리말을 잘 몰라서…
- 감사합니다 해 ㅋ
- 알았음
- 감사합니다
- 오냐
- ㅎㅎ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수의 핑경 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 누가 쓴 거야?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한예종 총장?
- 어 지금은 아니야 이명박 때 짤렸잖아
- 그래?
- 2004년에 전화도 걸었던 적 있어
- 왜?
- 촛불집회 ㅎㅎ
- 미쳤군
- ㅎㅎㅎ
황지우의 새 사진첩을 읽었던 그해, 마지막 시를 읽었던 시절이구나
대한민국 시의 계보를 세 황씨가 나눠가졌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황병승은 이제 추문과 함께 사라졌고 황인찬도 얼마전에 무슨 패션모델처럼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지만 이미 마흔을 앞둔 아저씨가 다 됐다 다음 세대는 분명한 건 황씨가 아닌 사람이 주름을 잡겠지
- 배고파
- 다이어트를 왜 해?
-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말 것
- 정말인데…
- 뚱뚱한 배우들 보면 싫어하면서
- 아니야 나 이영자 되게 좋아해
- 거짓말
- 정말임
- 이영자가 최진실과 친했던 거 알아?
- 정말임
- 어
- 몰랐네
최진실을 스크린에서 처음 본 게 1990년이었나 영화 ‘남부군’에서 햇살을 등지고 처음 나타난 그 신선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몇해 뒤에 직접 본 적이 있다고 전해 들은 그 까무잡잡하고 조그맣고 무척 까불더라는 한 생애의 마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 오빠 그거 알어?
- 바쁨
- ㅋㅋ
- 왜?
- 나 문창과에 대해 회의가 들어 자꾸만
- 이제 와서? ㅎㅎ
- 무슨 소리야 늘 똑같은데 글쓰고 합평하고 맨날 똑같은데 실력이 느는 건 알겠는데, 이렇게 쓰면 누가 읽어 하는 생각 말야
- 다 똑같지…
- 웹소는 잘 팔린다던데 차라리 그쪽으로 갈까 봐
- 그것도 하나의 대안
- 그럴까?
- 웬만하면 비추 ㅎㅎ
- ㅋㅋㅋ 머야
- 음… 본격문학과 웹소는 이제 다른 예술분야라고 생각해 독자층도 다르고 내러티브도 다르고 무엇보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나 싶은데? 문학이 찾는 게 진실인지 고독인지 삶인지 진리인지 인생인지 세계관인진 몰라도 웹소는 아예 그걸 비껴서서 있잖아
- 음 그래?
- 사람들은 팝콘 먹는 걸 좋아해 오래 묵혀야 하는 평양냉면이나 육개장이나 설렁탕 같은 음식은 전문점에 가 사먹지 집에서 잘 못해 먹잖아? 비슷하지 않나 싶어서 그래
- 무슨 소리야
- ㅎㅎ
- 패스트푸드 같은 게 필요한데 유튜브나 만화는 그게 되고 문학은 그게 안 되고 그 차이지
- 아항
- 진지충은 별로잖아 ㅎㅎ
- 그래도 가끔 생각이 나
- 그런 순간들이 있지 다만 일상 속에선 그 순간들이 너무 짧다고 생각해
- 이 카톡처럼?
- 그렇지
- 그럼 나랑 대화하는 것도 의미가 없네? 우씨
- ㅎㅎㅎ
- 회의 시작했어
그녀와의 추억들도 잊혀지진 않을 텐데 그 추억의 힘으로 먹고 사는 게 미래일 텐데 그 미래마저 도착하기 힘든 여정이라면 또 누군가는 일찍 마감해버릴 일도 생길 텐데 그다지 외면할 일 없는 주변의 정황들을 일일이 살펴가면서 걷는 이들도 별로 없을 텐데 다들 너무 바쁜 탓인지
(다음에 계속)
자유와 평등
- 오빠, 자유가 뭔 줄 알아?
- 글쎄 왜?
-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어 함 봐봐
- 자본주의 체제는 사실상 절대불변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사회주의가 제 한계로 무너져내린 탓도 있지만 자본주의만이 갖는 인간의 이기심 충족과 각 개인들의 자유의지를 극대화한다면
- 곧 사회의 총합적인 자유도 향상되는 원리는 수많은 경제적 결과로써도 충분히 입증되었고,
- 더 나아가 AI 같은 기술혁신이 곧 인류를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기본소득을 부여함에 따라서 오히려 사회주의가 꿈꾸던 이상적 사회로 더 근접하게 되었습니다
-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 ㅋㅋ
- 첫째, 자유는 타인에 대한 반작용을 충분히 고려하는 한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부분이고
- 둘째, 각 개인들의 이해가 상충되기 때문에 객관적 입장에서의 조율과 조정은 불가피하고
- 셋째, 자본주의 경제는 비효율과 낭비 뿐인데 생산력 문제로 극복해왔을 뿐이며
- 넷째, 기술혁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매트릭스랑 뭐가 다른지도 전혀 성찰이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무슨 이데아를 꿈꾼다는 거임?
- 디스토피아에 더 가깝지
- 오빠는 대안이 뭔데?
- 당연히 사회주의지 ㅎㅎ
- 망해서 그렇지 평등이 자유만큼 중요한 거라고 봐
- 오호
- 평등을 추구해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어
- 와이?
- 사회는 개인이 아니니까 남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니까
-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봐
- 음... 담배꽁초 있잖아 그걸 길바닥에 함부로 버리는 게 자유여? 남한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자유가 아니고 방종이잖아
- 그건 그래
- 모든 일이 다 그래
-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리 간단치는 않겠지 어차피 자유의지를 통제할 목적이 곧 사회주의니까 최소한으로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 그런데 문제는 그 어떤 자율과 규범도 모두 다 불완전한 인간들에 의해 만들곤 하잖아 정치나 윤리 같은 게 개입될 소지가 다분해지지 언젠가 당선소감에서도 말했던 게 "헌법보다 변증법을 믿는다"였어 과연 그만한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게 존재할까는 잘 모르겠어
- 오빠 말이 더 어렵네
- ㅎㅎ 그래 원래 어려운 얘기니까 나도 잘 모르고
- 잘 모르면서 왜 그렇게 떠들어?
- 소통이지 커뮤니케이션
- 그거 꼭 해야 돼?
- 이 카톡도 그런 거잖아 ㅎㅎ
유월, 찬란한 봄비가 지나고
막상 뜨거운 태양 아래서 지낼 생각만 하니
조금은 답답해집니다
아스팔트 위, 작열하는 햇빛
누군가는 꼭 숨어서 그늘을 만들었으면
또 누군가는 꼭 남아서 불꽃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빠 좀 그만 찾어
- 오빠, 뭐해?
- ㅎㅎㅎ
- 신문 스크랩 하는 중
- 그거 돈 돼?
- 아니 ㅎㅎ
- 근데 왜 해?
- 그냥
- 사람들 머릿 속을 그대로 재현하는 인공지능이 나왔대 이제 타이핑하는 노동도 곧 사라질 수 있거든
- 좋은 거야?
- 아니 ㅎㅎ
- 근데 왜 좋게 말해
- 그렇게 들렸어? 실은 무지무지 걱정이야 킬러 로봇들도 곧 나온대
- 헉
- 그럼 나쁜 거 아냐?
- 글치
- 일론 머스크가 육개월 개발금지 성명에 서명했다매
- 그게 대세에 과연 영향을 줄까 경각심을 일깨운 거겠지
- 맞오
- 오늘은 몇시에 출근?
- 오늘 재택근무여 ㅎㅎ
- ㅋㅋ 맞다 금욜이지
- 오빠 좀 그만 찾어 ㅎㅎ
- 알겠음 ㅋ
흐린 유월의 새벽
네시부터 찾아온 김남주 시인
햇살 그리운 감옥의 창살을 읽다
시집을 들춰보니 1987년이었다
그해 유월의 새벽도 흐렸을까
아침의 새소리
새 것과 새의 것은 달라도
새소리만큼은 공통분모라서
아침에 듣는 새 소리가 좋아서
이기리 시인? 몰라도 되는 시대
함께 독립출판을 준비하자던 나는
제도권 등단 지망생의 핀잔을 듣고
옛 것과 새 것이 다른만큼은
개소리보다도 새소리가 더 좋아
20세기의 황지우는 미래파가 아니니
읽지 말라던 문창과 교수가 있었고
과거의 예술이 현재의 거울이라던
최인훈 선생의 화두가 생각날 뿐
허허 하며 웃으면 그만이지
각자도생만이 진리인 나라에서
조국의 소리를 찾을 필요도 없잖아?
선생님, 하면서 헌 소리만 쪼개던
문학사상 6월호 황인찬 브로마이드
아이돌의 전성시대인가 봐
그래미는 아이돌한텐 안 주는 법
제 무덤 판 시단에 못까지 박은 시인
그래서 그냥, 새 소리가 더 좋아
10년은 훌쩍 넘는 새소리
마케팅 전략
- 오빠, 마케팅 전략이 뭐야?
- 아후, 또 왜 ㅎㅎ
- 문창과에서 마케팅 전략은 왜 또?
- ㅋㅋㅋ
- 오빠가 꽉 잡고 있잖아
- 오홀 잘해?
- 잘하는 게 어딨어 ㅎㅎ
- 3C, 4P 뭐 그런 거지 뭐
- 그게 모임? +_+
- 그런 것들 있어 골치아픈 것들
- 3C : Customer Company Competitors 4P : Product Price Promotion Place
- 오홀! 전문가넹
- 무슨 ㅎㅎ 개나 소나 다 알어
- 마이클 포터의 5-Force도 중요해 맥킨지가 쓴 7S도 자주 쓰이고 스타일, 시스템 뭐 그딴 거
- 그것들도 좀 알려줘봐
- 나도 다 까먹었지 구글 찾아보면 다 나와
- 포터 : 기존 경쟁, 신규 진입, 대체재, 공급자, 구매자
- 7S : Shared Values, Strategy, Structure, Systems, Skills, Staff, Style
- 저게 다 몬말이야?
- 근데 갑자기 마케팅은 왜?
- 어 나 소설 쓰거든 저것들 써야 돼
- 알아야 쓰지 ㅎㅎ
- 그러게 ㅋㅋ
- 저거 책 한권 읽어둬 그럼 다 나와
- 내가 그걸 왜 봐 오빠 있잖아 ㅋ
- 아휴 난 몰라
- 모르면 어떡해
- 밥먹고 맨날 저것만 해서 머리 아픔
- 재밌어 보이는데?
- 이론만 있음 뭐해 실적이 있어야지 기업인데!!
- 글쿤
- MBA 놈들이 해외 문물 팔아먹는 거지 지들이 뭘 만들 생각은 못하구
- 우리 과 애들도 똑같아 문체가 아름답다면서 너도 나도 일본 소설 ‘금각사’만 읽고 따라해 ㅋㅋ
- 미친 거 아님? 매문행위 아닌가…
- 그 문체가 좋대
- 김승옥이나 읽으라고 해 황지우도 좋잖아 리얼리즘도 멋있잖아 국어 쓰면서들 번역을 직접 하든가
- ㅋㅋㅋ
- 아무튼 오빠 나한테 그거 어케 알려줄 거야
- 몰라 바빠
- 아이잉~
- 뭐 어쩌라는겨??
- 미워랏
- -.-
분산에너지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날
고위층의 지시로 전략과제에 투입됐다
사업인지 전략인지 뺑끼인지 모를 프로젝트
파워포인트의 성찬을 한바탕 베풀고나면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겠지
5-Force는 한번쯤 생각해봐야지
살인적인 등단 경쟁률과 비주류 문학의 등장,
영화나 가요랑 전혀 다른 문창과 생태계의 협소함,
더 이상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독자층 등등
이 막장 스타일의 시창작도 여기서 일단 접고,
앙가쥬망
- 오빠, 나 우울해...
- 엥? 또 왜 무슨 일인데...
- ...
- 말을 해야 알지 (짧은 침묵)
- 합평모임에서 시 경진대회를 했는데 내 시가 재미없대
- 흐음
- 난 네 시가 좋아
- 그래?
- 따뜻해서 좋아 퇴고를 한 흔적들도 역력해 더 좋아
- 그걸 어떻게 알지?
- 문장이 술술 잘 읽히니까 처음 써놓은 습작들은 원래 덜컹거리거든
- 으흠
- 퇴고를 한 신실함을 알면 저절로 글에 몰입할 수 있거든 진지해지니까 어떻게든 들어볼 생각이 드니까
- 그럼 오빤 즉흥시는 별로겠네?
- 예전엔 랩소디도 자주 썼지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니 잘 익은 열매가 더 좋은 향이 난다는 걸 또 알게 돼
- 아무튼 재미가 없다고 하니 할 말이 없잖아
- 재미가 꼭 있어야 해?
- 아무도 안 읽잖아
- 한 명만 제대로 읽어도 되는 게 시 아녀?
- 흠 그건 그래
- 시청률 꼴찌 한 드라마가 백상예술대상도 타고 하는겨
- 그럴까?
- 작품의 기준이 꼭 재미는 아니라고 봐
- 문창과 애들 맨날 물고 빠는 황인찬 시는 재밌어?
- 전혀
- 몇몇들끼리만 재밌다 잘썼다 떠들면 뭐해 아무도 안 읽고 다들 외면하는 걸
- 예전 김수영문학상을 누가 탔나 생각해 봐 이성복 황지우 장정일이잖아 모두가 다 누군지 알았어 요즘은 누가 탔지 아무도 모르잖아? 자기들 무덤은 스스로 판 거 아님? 그 시절에도 지금보다 훌륭한 좋은 영화, 좋은 노래들은 훨씬 더 많았었어 타 예술쟝르 탓? 그건 핑계가 안돼 다들 철저히 반성해야 해
- 뭐가 문제일까?
- 시대를 못 읽고 있잖아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뭐야?
- 글쎄...
- 그런 건 싹 다 집어치우고 무슨 본인 내면의 정서? 누가 관심을 가져 그러니까 아무도 안 읽지 자기 얘기가 전혀 아니니까
- 흠
- 시대정신을 잘 생각해봐 그게 아마도 답일 거야
- 시대정신이 뭔데?
- 당대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절박한 문제들 그걸 써야지 무슨 자기 일기장 낙서장 몇줄 꺼내놓곤 그걸 시라고들 그래
- 민주주의는 여전히 수많은 난관들에 봉착해 있고, 자본주의가 낳는 패덕들은 또 얼마나 많으며 소외된 영혼들은 힐링이 아니고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할 것이며 등등
- 그런데 그걸 왜 문학이 해야 돼?
- 그럼 누가 해? 그런 걸 쓰는 게 시인이잖아
- 앙가쥬망이네
- 영어로 engagement
- 참여를 해라?
- 참여 없는 시는 시도 아니야 그냥 일기나 낙서지
- 다들 그렇게 쓰지 않았나?
- 그러니까 독자들은 점점 사라지지 내 얘기가 전혀 아니거든 그런 거 읽을 시간이 누가 있겠어
문득 김현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시대와 호흡하는 시의 예민함 그 역할과 의미
앉아서 몇줄 썼냐 떠드는 시답잖은 것들은
그저 껍데기 뿐이라는 거다
껍데기가 아니려면? 속을 더 채워야겠지
내가 아닌 남으로부터 우리들로부터
그게 정녕 시가 아닐까 해
작가란 무엇인가?
- 오빠 일어났어?
- 어 바쁘네
- 월요일이네
- 그래도 내일음 현충일
- 그렇지 ㅋ
- 하루만 잘 버텨야지
- 화이팅
- 어제 시는 잘 썼어?
- 응 대충 써서 냈어
- 이달 안에 문집 나온다고 했었지?
- 응 말일께에 나올 것 같아
- 오빠가 몇권 사줄게
- ㅋㅋ 좋지
- 단 한권도 안팔리는 독립출판도 수두룩해
- 맞아 ㅠㅠ
- 힘내
- 고마워
- 나 출근한다
- 응 잘 다녀와
살벌한 정글과도 같은 출판시장에서
과연 독립출판은 생존 가능한 방법이겠는지요?
알만한 사람들이 죄다 몇몇 브랜드를 고집한 일은
적어도 퀄리티라거나 또는 안 망하는 것 때문일 테니
끝까지 인내하며 책을 낸다는 게 더 중요하겠죠
그런 생각을 해보는 아침입니다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는 글을 쓰다가 죽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빨을 조심해야지
접시를 깨뜨리자던 노래가 있고
실제로 접시는 잘 깨진다
뭉툭한 손으로 매끈한 옆구리를
살짝 놓치기만 해도 와장창 해
인정사정 볼 것도 없다
제 아무리 노련한 어머니라도
조심히 빨간 장갑 낀 요술사도
자칫하면 깨먹기 십상인 접시
이가 빠진 그릇은 약과여
너스레를 떤 나도 설거지하다
그만 그릇끼리 부딪치며 깼고
몇몇은 이가 또 빠졌는데
이 빠진 그릇은 내력이 없나?
혼자 중얼거리다 더 깨질까봐
조심히 그대로 놔둔다
테연한 그릇, 점점 더 낡아
이젠 빠진 이도 점점 더 커지고
금이 가기 시작해 버리란 신호
접시를 깨자는 노래도 있는데
이 빠진 그릇은 왜 안 위험해?
서서히 늙는 건 안 위험해
작정하고 조심해야 할 이빨
하나만 빠지면 바로 늙는겨
기억에 관한 아주 짧은 목록
- 오빠, 묵념했어?
- 어제?
- 응, 어제였지
- 당연히 했지
- 누구한테?
- 이 땅의 문인들한테
- ㅋㅋ
-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 박경리 최인훈 김현 김수영 김승옥 천상병 김남주 김광석 박완서 이형기 조세희 등등
- 김광석도 시를 썼어?
- 내 기준에선 시인이지
- 오홍
- 직업은 다양할 수 있잖아 더 많지
- 최하림 마종하 이청준 오규원 고정희 마종하 이가림 채광석 김세균 백기완 노회찬 리영희 박영근 홍정선 이영유 허수경 그리고 가장 최근엔 최일남 선생까지도, 내겐 다 문학이셨지
지나간 이름들 앞에 국화 한 송이
국화만큼, 보다 더 예쁜 장미꽃 만발한
유월의 새 아침에도, 그들을 기억해
항상 기억했어 기억하고 있었어
- 현충일 저녁에도
주말
- 오빠, 안 자?
- 어, 낮에 하도 잠을 오래 잤는지 밤새 글쓰기만 할 것 같아
- 그래
- 넌 왜 안 자?
- 이제 자려고
- 도서관은 다녀왔어?
- 아니, 책을 모두 다 빌려서 당분간 안가도 돼
- 다 읽었어?
- 아니, 한 권도 못 읽었네
- ㅋㅋ
- 그런데 주말에도 바빠서 어떡해?
- 다들 똑같지 뭐
- 난 학생이라 한가해
- 원래 학생이 제일 한가한겨
- 맞아
- 소설을 하나 쓰기로 했는데 영 진도를 못 뽑네
- 무슨 얘긴데?
- 어, 기업 판타지 ㅎㅎ
- 미쳤군
- ㅎㅎㅎ
- 카톡을 시로 바꾸면 어떨까 싶어
- 별 생각을 다 하네
- 시와 산문의 경계 정도를 늘 생각하는 중이야
- 그런 게 가능하겠어?
- 쟝르 이름도 그냥 '글'이야
- 글, 좋네
- 나 이제 잘게
- 그래, 잘 자고
- 일요일엔 교회 다녀?
- 아니, 이제 지겨워
- 그래, 그럼 책 읽어
- 알았어 ㅋ
- 잘 자
- 오빠도 잘 자
- 그래
쟝르에 대한 판타지, 그런 게 있었다면
애시당초 시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훨씬 더 큰 그릇이 시를 잡아먹었을 수도
그래서 소설이 아닌 '글'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말, 저녁, 그리고 밤 또 새벽
끊이지 않는 글쓰기는 어느새 두어 시간
제 갈피를 못 잡는 문장들이 줄곧 서성대고
맥락을 잇기 위한 고심스러운 흔적만 맴돌 뿐
문득 생각나던 어제의 한 마디, 따끔하던 경구
낙선작이 곧 후속작이야 부지런히 쓰기나 해
시를 쓴다는 것, 쓰려고 하는 것
- 오빠, 일찍 출근해?
- 어, 오늘은 8시까지야
- 어휴, 힘들겠네
- 졸려 미치겠음 ㅎㅎ
- 벌써 유월이네...
- 그래, 유월...
- 유월이면 이제 여름이지?
- 응
- 여름이야
- 바다 가야지!
- ㅋㅋ
- 올해는 동해바다를 볼 수 있을까
- 모르지 하도 막히니
- 그래, 또 막히겄지
- 일찍 일과 끝내고 회식 예정
- 술 조금만 먹어
- 어차피 많이 먹지도 못해
- ㅇㅋ
남루한 일상 끄트머리에서 소라 껍데기마냥 윙윙대는 음악을 연주하던 기억들은 이제 그 고요함 속에서 제 홀로 망각의 빛을 뿌려대곤 하는데, 그 찰나의 기억들을 다시 꺼내놓는 시간들은 혹여 이마저 잊어버리진 않을까 해 무척 조바심을 갖는 일들이기 십상이기에 때때금 괜한 걱정 속에서 그 화사한 문양을 지그시 쳐다보곤 했습니다 더는 잃지 말아야 할 텐데... 하지만,
서정시를 잊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괜시리 심술부터 더 났는지도 모르지만 은유와 상징으로 온통 범벅인 암호문들을 해독하며 과연 이게 시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일기가 아닌 이상, 단 한 명의 독자도 시를 넘어선 또 다른 무엇이기에 더더욱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일들도 많겠죠... 그래서,
도대체 시는 왜 쓰는가, 왜 쓰려고 하는가를 스스로한테 묻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지식의 최전선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하기 힘든 무엇을 곰곰히 또 생각해보는 시간
고래 한마리
여의도역 3번 출구 앞
Low G선의 아리아는 구슬프게도 울린다
우쿨렐레 한대가 기타와 맞먹는다?
Low G선을 모르면 다 가짜야
일본의 한 연주자는 카네기홀에도 섰는데
이것보다 교양있는 건 5만원짜리 중국제
어쩌다 보니 여의도 합창단의 시간
두리번 두리번 이게 아닌데 맞는데
Low G선을 켜자, 베이스음이야, 두드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베이스음이야, 두드려
이곳은 여의도 한복판, 자본주의의 광장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장미들의 축제
나의 고래는 어딨지?
하며 물을 때, 불쑥 솟는 고래 한마리
자본주의의 미래를 묻는다, 너는
나는 과연 미래라는 게 있을까?
화석처럼 박제화된 네 운명 자본주의의 날개
다시금 Low G선을 켜자, 베이스음이야,
두드려,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너는
나는 연초록을 뚫고 나온 장미 한다발
고통의 축제를 즐길 줄 아는 봄의 벚꽃들
내 새빨간 입으로 다시 두리번 두리번
이 광장을 빠져나갈 수 있어?
다시 묻는다
광화문 네거리의 왼손잡이 동상
저마다 가방을 둘러멘 채 종착역에 내리면
아득해진다 수십년의 알 수 없는 세월들
서울시는 또 무덤을 팠다
차량을 한곳에 모두 몰아넣고 매끈히 새단장을 한 그곳
강강술래하듯 늘어선 십수 개의 묘지들
은회색 화강암 한구석은 내 거처
가로 삼미터 세로 삼미터의 노트북 두개짜리 책상
나의 편집실
하루종일 손가락을 두드려보지만 끝을 알 수 없는 길
나의 고향은 박노해요 황지우였다 시와 경제
광야를 달리던 노동의 새벽이 화엄광주를 만났고
때 이른 출근길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는다
새하얀 도화지에 새겨진 핏빛 상형문자들
그 상형문자들 속 모국어는 끝내 답을 내놓지 않는다
늙은 노동자들이 제각기 이기심을 품는 곳
썩어빠진 자본주의의 욕망이 멸망의 속도로 질주할 때
하나둘씩 왼손을 꺼내 잊었던 전화번호를 찾는다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소금기가 있다면
그건 내 것이 아냐, 내가 주변에 뿌려둔 소금을 맞는 사람들의 것이겠지*
아침부터 소금을 뿌려 길에서 담배를 피운 아저씨한테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도 않는 여고생한테 늦은 밤에도 귀가를 않는 철부지 자녀들한테 밥도 짓지 않는 게임중독자한테 공원에서 큰 개한테 끌려다니는 노인들한테
소금을 맞는 사람들이 소금인형으로 변해 나를 마구 공격하게 되고 태연히 그들의 주먹을 피해 쏜살같이 도망치곤 해 소금인형들은 어느새 빗방울이 되곤 해 때로는 바다와 섞여 아주 맵고 짠 짬뽕국물을 만들기도 해
피하려다 얼핏 맞았던 내 오른쪽 팔꿈치에도 결정이 묻어났어 아차 싶었다, 금세 종유석을 닮은 뿔이 솟아오르고 한조각을 떼어내면 제법 능란한 솜씨로 그 창끝을 상대한테 겨누게 되고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던 사람들이 있어 시간을 달려 닿고자 한 그곳은 치유책이 있을까 더 이상 공격받기 싫은 이들이 동굴로 피해 땅밑을 질주하는 새벽
첫 차가 아직 오지 않은 플랫폼에서 난 또 한 소녀를 쳐다봤어 무심한 표정 피곤함에 찌든 두 눈동자에도 소금을 뿌려줬어 고맙습니다 캔커피를 권하자마자 대뜸 소리를 질렀어 아 씨발, 뭐야
소금인형들이 차례차례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드디어 설국열차가 도착했어 북극곰은 아직 살아 있을까 종착지에 가면 눈앞에서 볼 수 있다던 그 북극곰 한마리, 그리워 또 한차례 소금을 뿌리자 이번엔 아예 하얗게 변색된 의자에서 또 다시 소금이 돋아나고 주섬주섬 그것들을 줍는 사이에 열차는 덜컹거리며 서울특별시로 향해
소금의 도시는 원래 짠 법
* 송기원, 아름다운 얼굴
2023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보기 좋게 떨어졌다
무려 14명 본심 대상자 명단이 입소문인데
내 이름은 아예 없었고
그래, 잘 쓰지도 못했는데 뭘
하며 지레 자괴감 뿐인 표정 숨길 길 없어
창비는 정기구독도 시켜준다매
하면서 아쉬움도 달래보지만
그런다고 본심에 내 이름 오를 일 없고
조잡한 창작이 겪어야 할 수모, 당연한 법
애시당초 잘 써야 돼
당연한 말들을 인사처럼 나눈다
잘 써야 돼, 잘 써야 돼
버릇처럼 되뇌이지만 과연 잘 써질까
밤을 잊은 고심의 흔적들 모두 휴지였고
시대를 앞서자며 내민 서정도 쓰레기였다
남는 건 오로지 난해할 뿐인 알레고리
내게도 저걸 서정이라 이름을 붙이면 돼?
되묻고, 또 그렇게도 써보고, 또 다시
자괴감이 든다, 매뉴얼이냐?
박노해의 시를 다시 읽는다
가리봉시장 너의 하늘을 보아
따듯해진다 내가 찾던 정서였어
박노해가 뭘 썼냐며 의문을 표한 벗에게
카카오톡으로 건넨 시들이 답을 얻는다
백만 부는 팔려야 진짜 시집이지
노동의 신산함이, 눈물을 아낀 슬픔이
한움큼씩 주머니 안에 가득한 시를
읽고도 또 보고싶어지는 시를
그리운 편지 같은 시를
써보고 싶다 써보자
그렇게 써야겠어
다짐한다
잘 쓰지 않아도 돼
다만
너의 하늘을 보아
섬에서 먹던 성게알만큼 반짝이던 눈동자에서
기억을 더듬어 보아요, 밥을 말아먹어도 좋을 법한 맛난 식사 한끼만이라도 대접하겠다는 당신한테 못할 말 무던히도 많이 건넸던 그때가 생각나요 항상 무덤덤히 무신경하게 웃던 모습들도 함께 떠올라요
내가 던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따개비처럼 돋아나고 그것들이 온통 장악해버린 큰 바위들 틈에서 바다의 물결은 항상 고요하기만 했어요 실은 고요하지 않았을 뿐인데도요
밥을 말아먹어도 허기질 때가 있어요 그런 날엔 다시 그 바닷가로 향하곤 해요
한끼 식사로도 좋을만큼 따개비를 잔뜩 따다가 국을 끓여 먹었어요 그 속엔 지난 이야기들과 그 안에 가시처럼 박힌 내 낱말들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어요 국을 한 숟가락 떠먹을 때마다 눈에서 진주를 빚곤 했어요
이곳은 이미 어두컴컴한 바위 그늘, 한 무리의 일행이 남겨놓고 간 신문지들과 깨진 병 하나만큼 잔혹한 잔해들이 쌓여 있어요 털썩 주저앉아 바다를 보면 어느새 햇살이 저만치서 빛을 수놓기 시작하고 있어요
철썩이는 파도, 부산스럽게 오가며 울음을 놓는 갈매기들, 매캐하기만 한 공기...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보아요, 언젠가 당신이 말했던 그 말의 그림자도 이미 식탁에 함께 앉았어요 그 시절, 그 때, 그 기억, 그 언젠가 그 먼 나라의 섬에서 먹던 성게알만큼 반짝이던 눈동자에서 하고팠던 낱말들을 이제야 읽어냈어요
황인찬풍으로 읊는 2023년의 연애시
이밤
왠지 그대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지난 세월이 곰팡이처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식탁 위 먼지들이 스스럼없이 뽀얗게 쌓이고…
슬며시 앉아 그 먼지들을 자세히 살폈다
하얀색, 흰색, 희검은색,
연초록,
회색,
진회색의
각각의 깃털들이 가루가 돼 더 높이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렇지만
문득 그대 떠오를 때면
이 먼지들도 떠오르겠지, 함께
쳐다봐서,
족하다…
하는 생각이면 족하다
졸음이 쏟아졌고
졸려서 바깥으로 나섰다
담배를 피우던 옛 손가락이 어느새
희미해졌고 희미해지고
희미해지고 희미해지졌고…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황인찬풍으로 읊는 별 생각
부드러운 희미한 선
맨 밑바닥에 그늘을 놓았다
박물관 한켠, 내 이름도 평론에 날까
세상의 모든 소란스러움을 담는
가장 조용한 찰흙 한 덩이
영원성을 추구한다
모든 시대를 거친 반동
내가 꿈꾸는 지옥, 그 아귀다툼 속
또 졸음이 밀려 왔다
밖으로 나선다 (익숙한 레퍼토리처럼)
유월의 삼십오도 태양이 점점 빛나고
형광등 아래 내 빛, 은은하기만 하다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나는 오천원짜리 요강
별 생각을 다 해본다
*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그믐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재즈
한 곡조의 피아노 연주가 끝나면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곤 했어요 노래가 흐르는 동안 잠시 놓았던 손을 다시 잡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라는 낱말이 제법 잘 어울렸던 것 같아요
암전이 시작되고 서서히 연분홍으로 물든 무대가 켜지면 맨 먼저는 건반이 움직이곤 했지요 사랑이 처음 싹트던 때를 회상하는 느린 선율에서는 항상 벚꽃이 흩날렸던 기억일 뿐이었어요 이윽고 환한 연초록빛이 등장하곤 했어요 가느다란 색소폰의 날렵한 화음이 그 순간들을 장식하고 그때마다 우리들은 서로를 향해 웃었던 게 기억나요
대화들이 움직였지요 한 음, 한 음마다 힘겹게 이정표들을 쌓고 가볍게 일렁이는 춤사위에서 차곡차곡 일기들을 써내려갔어요 각자의 일기들 속에서 한때는 나, 한때는 너였던 우리들은 피아노의 선율에 맞추어 밤하늘을 여행하는 동반자로 충분하였던 시절들
또 다시 불협화음처럼 도착한 낯선 장소에서 때로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본 게 기억났어요 어쩌지, 하면서도 응원을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고요 큰 비라도 맞닥뜨린다면 함께 우산을 썼으면 됐을 걸 하며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지만요 그렇게 우린 헤어졌을 뿐예요
십삼 년의 긴 세월 동안 흐르고 있던 곡조는 비로소 멈추고 무대 한가운데가 텅 빈 지금, 늙음의 방식을 단 두 개의 왕관이 함께 무대 위에 다시 올랐어요 마지막 한 소절의 피아노 연주가 귀결처럼 흐르는 동안
잘 지냈어
잘 지내요,
이윽고 침묵에 휩싸이면
우리가 함께 날아오르던 곳, 말갛게 그믐달이 뜨고
지나간 오천 개의 달들이 어렴풋이 생각났어요
그 달들의 흔적을 좇아 모처럼 여행을 한 기분
그대는 또 손을 잡아요
약속이 아닌 믿음
그믐은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 영화 '라라랜드'의 회상 몇
황금족발
토실토실한 앞다리를 잘 삶아낸
먹음직스러운 빛깔인 줄 알았어
윤기가 자르르한 갈색껍질의 빛
그걸 엘도라도의 꿈으로 알았어
비닐을 벗겨내자 쏟아진 알갱이
상추잎에 한톨을 묻혀 먹어봤어
진짜 금가루를 거짓말같이 뿌려
그걸 황금족발이라 불렀던 거야
신기하게 웃으며 새우젓을 찍고
다시 마늘과 고추를 얹어놓으면
큼지막한 족발 한점이 포개지고
한입 가득 넣으면 벙긋해지는데
너 한입 나 한입, 함께 나눠먹던
동의도 필요없는 협동의 만찬을
오늘 또 한번 내일 또 한번 먹던
다사로운 계절이 문득 기억났어
시인 이문재의 편지를 읽다
해마다 천편 이상의 시들을 꺼내 살리기는커녕 스스로 이들을 쓰레기통에 버려 죽여야 했던 시인의 고충은
세 종류의 시인이 있고, 자기가 쓸 줄 아는 것만 쓴 시인과 자신이 쓰고싶은 것만 쓴 시인과 자신이 써야 할 것을 쓰는 시인이 있다는 말씀은
한 시대의 분노로 서정시의 의인화를 거부하고 식물성 이미지를 탈피하자던 그 울림의 목소리는 이제,
난데없는 오천원짜리 요강의 소리없는 아우성과 알 듯 모를 듯한 외계어의 반복적 유희들 앞에서 더는 속절이 없습니다
짐짓 진지스러움을 거부한 채 더는 시대를 말하지 않는 시절은 시인한테 더 절망스런 침묵을 요구합니다… 문득 시인의 생각이 더 궁금합니다
서정시가 어쨌냐고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가 어쨌다고요
분노의 시 서사와 진술의 힘 그게 곧 서정시였을 텐데
서정시가 아니라면 시를 정의하려는 게 문제였을 텐데
나태주가 없었다면 쉬운 서정시를 말하지 못했을 텐데
류시화 없인 로맨틱한 속삭임을 나누지도 못했을 텐데
황인찬의 입소문은 허무개그라도 회자될 수 있을 텐데
이제니의 말장난은 장난이 아닌 고집이라도 남길 텐데
설익은 치정은 다소 격정적일지라도 여전히 시일 텐데
시답지 못하다는 말은 시인이 시인한테 함부로 붙였고
그래서 시인은 시를 떠났고 빼어난 공산품들만 남았고
무엇을 또 시라고 할 것인지 누군 또 아니라 할 것인지...
* 박노해, 노동의 새벽
밥을 위한 시에 관한 한 변주곡
이건 노래가 아닙니다 문청의 홍역을 앓던 그해 십이월에는 겨울 가뭄이 계속된다는 뉴스뿐이었습니다
길거리마다 마른 낙엽들이 신호등처럼 깜빡이던 후미진 골목길에서 책가방 속 옛 시집 하나를 힘겹게 꺼내 읊던 방학의 시간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한 계절을 나기 위한 의복은 야상 한 벌뿐, 한 계절의 그리움을 담기 위한 시집은 수백 권이나 되었던 게 기억납니다 한 선배가 들려준 밥에 관한 시에 대해 우리들을 생각할만한 화답시로 습작을 하곤 했습니다
십삼 년이 더 흐른 올해 여름이 사십 도를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선풍기 하나 제대로 틀지 못한 믿음은 지난 세월을 배반한 흔적들 뿐이었고, 그새 가뭄은 몇 차례가 더 일었을 뿐입니다 한 계절을 잘 버티려면 에어컨 한 대쯤 장만해야 한다던 어머니도 아직 제 형편을 자세히는 모르고 계십니다 밥이 되는 시를 팔아 가끔 오만 원을 벌면 국밥이 다섯 그릇인데 이틀마다 시를 싣겠다는 문예지도 매번 생겨나진 않았습니다 후배들을 만날 때면 절대로 시 쓰지 말라는 당부만 했을 뿐인데도요
이건 후일담도 아닙니다 그저 버티다 보면 무언가라도 되겠거니 하는 착각 속에서 우쭐하고 초라했던 시간들을 경과한 우리는 여전히 배를 곯고 때때금 이름을 얻은 몇몇이 무슨 무슨 대학 강단에서 시집 한권보다 더 비싼 과외비를 하루 만에 충당해 거리낌없이 식사를 대접하곤 했었는데요 전혀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밥이 되지 않는 시를 쓰는 일에 점점 더 익숙해진 우리는 그저 다른 일들을 마다했을 뿐인데도요
지난 해 가을, 가장 친했던 벗과 비로소 헤어졌습니다
함께 시를 쓰고 함께 여행을 한 추억들도 이젠 아스라해져 더는 말을 잇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다른 일들을 마다했을 뿐인 영광은 영광을 대체할 뿐인 상처로 못내 아쉬운 여름밤의 야광충처럼 밤을 잊은 채로 제 곁을 맴돌 뿐입니다 꿈결 속에라도 그걸 치워버리는 동안 시간은 몇 해인지도 모르게 쏜살처럼 십삼 년 동안을 거쳐간 것뿐인데도요
새로운 노래를 써내려가는 동안은 점점 더 넓어져만 가던 방 안의 공허함으로 지난 봄날을 겪어온 것 뿐입니다
예전의 기억들을 차례로 시에 담아 후비고 짜내며 새로 발견한 생채기들은 다시 어루만지고 즐거웠던 한때도 가끔씩은 써놓았거든요 즐거울 뿐입니다 즐거운 편지를 유서마냥 남겨놓았던 영화도 그 시절 오랜 동화처럼 들려주게 될 뿐인데도요
오월 한 철의 꽃잎들이 차례대로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아아, 아쉬운 순간들이 어김없는 시간들 속에서 명멸하며 남긴 그 그리움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도요
하루 세 끼의 밥을 위한 시에 관한 노래는 이제 더 이상 부르지 않겠습니다
하루 세 끼의 밥을 위한 시에 관한 후일담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해요
하루 세 끼의 밥을 위한 시에 관한 한 변주곡은 새로 준비해야 할 테니까요
작가라는 모멸감에 대하여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송경동 시인이 팔을 꺾인 채 코엑스 앞마당에 내쳐졌던 주말,
대통령은 수능시험이 너무 어렵다며 누군가를 전격 경질했고 학원가에선 온통 밥벌이를 걱정했다
송경동 시인이 작가도 아닌 시위꾼이라며 쏘아붙이던 한 사람과 지루한 말다툼을 벌이다 끝내 포기를 했고,
어차피 두해짜리 매뉴얼이 있는 대입시험을 경솔히 발언한 대통령을 탓하며 차라리 침묵하기를 권했다
문득 '이 땅에 부치는 시'를 썼던 한 선배가 생각났다
그 선배는 지금쯤 무얼 하며 지내고 있을까
어느 한 문청한테 등단을 한 데뷔시집이 천오백 부도 팔리지 않는다며,
문예지에 한 편을 싣고 잘해야 오만 원 정도를 벌 수 있다며,
일 년에 육백 편 가량 시를 써야 한다며 이공계 전공을 칭찬해주기도 했다
시를 쓴다는 건 사실 굴욕적인 일이다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시만 쓴다는 이들도
바라는 게 있어서 시를 쓴다는 이들도
스스로 만족할 줄 알기에 시를 쓴다는 이들도
도무지 제 희망을 얻긴 힘들어질 일이다
왜 쓰냐, 묻거든
왜 묻냐, 따지던
묻지 않을 얘기들로 수를 놓던 지난 밤에도
그저 쓸쓸히 남는 낙엽, 그리움, 는개 같은 아침
그런 무책임함을 실은 모멸감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모멸감을 이기기 위해 시를 읽고 쓴다
모멸감을 응어리진 채 분노를 슬픔을 말하곤 한다
그 슬픔과 고독 속에서도 빛나던 게 과연 희망일까
항상 자문해온 일일 뿐이다
밥이 되지 않는 시를 쓰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 작가가 아니다
밥이 되진 못해도 누군가의 진주를 캐낼 수 있다면 하는 희망 따위를 품지 않는 건 더더욱 작가도 아니다
왜 쓰냐, 묻거든
부끄러워서 쓴다고 해야 맞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랑할 게 없다,
그래도 쓴다
왜 쓰냐, 묻거든
아코츠네 공주의 실험실에선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가만히 있어 봐
공주는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임에도 공주는 스스럼없이 옷 한 벌을 빌려주었고, 어젯밤 몰래 훔쳐온 과일 두 개를 건넸다 이게 더 맛있을 거야 하면서도 자기는 됐다며 끝내 먹지를 않았다 한 입을 베어물면 입 안 가득히 퍼져오는 과일 향에 취해 순식간에 두 개를 먹었는데 배가 불렀다 공주는 지금 내게 빌려준 옷을 입히는 중이다 배가 부른 탓에 허리가 조여 살짝 기침을 했고 공주는 웃었지
이제 날아볼까?
공주는 내 손을 잡고 성 꼭대기까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큼 그 발끝은 가벼웠고 무겁게 쫓는 내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꼭대기에 다다를 때쯤에는 이미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헉헉 대며 크게 숨을 쉬었고 공주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곤 이내 다시 계단을 오르곤 했다
저기 좀 봐
공주가 검지손가락으로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를 가리켰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내 눈에도 그 장면에 꽂혔는데 커다한 산맥 한가운데를 가르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폭포가 대뜸 눈에 띄었다 거대한 폭포, 공주의 한 해 마실 물을 저 폭포에서 길어 나르던 짐승들이 가볍게 울음 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저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난 이미 목 말라 죽었을 거야 공주는 한숨을 내쉰 표정으로 내 눈동자를 쳐다봤지
자, 오르자
하면서 내 손을 맞잡은 공주가 먼저 하늘로 날아오른다 훅 하는 바람이 크게 한 번 일었고 두둥실 내 몸이 가벼워지더니 이내 공주의 치마 끝에서 함께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가벼운 몸짓으로 하늘 유영을 하듯 하늘을 날던 두 몸은 가볍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네 소원이 뭐야? 공주가 물었고 잘 들리지 않는다며 큰 소리로 대답했어 무지개를 보고 싶어 알았어
어때? 무지개야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담는 표정 속에서 공주는 한번 웃어주었고 그 황홀함에 취한 나도 그만 웃었다 이윽고 다다른 골짜기에서 가볍게 발끝으로 땅을 디뎌 다시 걸었다 새하얀 풀숲과 가녀린 짐승들이 하나둘씩 피하며 길을 내주고 폭포의 맨 가장자리에 서서 물보라가 하늘로 상승하는 광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공주는 손끝으로 물보라를 향해 둥그런 원을 그렸고 마침내 하얀 포말 사이에서 희멀건 무지개가 솟아났어
여기가 내 아지트야
공주는 크게 웃었다 나도 따라서 크게 웃는다 어젯밤 살해를 당한 공주의 눈빛은 모두 사라져 앳되고 당당한 희망 뿐인 표정 속 두 눈동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진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항상 저만치 발끝에서 시작돼 이처럼 두 눈 사이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잖아 공주는 말없이 두 눈으로 내게 그런 말을 건넸지
어쩌다 마주친, 그대*
정적, 인트로 연주
영원할 것만 같은 전기기타의 선율, 벌써 일흔이 된 구창모가 만들었던 노래는
배철수라는 아티스트가 왜 뛰어난가를, 뒤늦게 음악캠프에서 알아차렸던 우리는
벌써 일흔이 된 그가 이젠 은퇴를 바라볼 요량인지, 차츰 말수가 적어짐을 알았던
그해, 1987년 여름
6월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온통 떠들썩하던 그날, 역사시간에 선생님은 알 수 없는 말들로
오늘의 환희를 기쁨을 표현했고, 우리들은 그게 무슨 말씀인지 도통 알아듣지를 못했었고
반 년을 넘게 온통 취루탄과 돌멩이 뿐인 신작로에서, 모처럼 차들이 행진을 했고
늦은 밤 자습시간을 끝내고, 처음 찾은 술집에서 친구는 소주 한 병을 혼자 다 비워내면서
철학을 공부해야 돼,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기도 했던
그해, 봉봉다방에서는
살인범의 아들을 향해 살인범의 아내가 달걀을 쏟았고, 뒤늦은 눈물을 도닥여주었으며
미스코리아가 꿈인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던 한 편집자는, 끝내 줄리엣을 자처했으며
아들을 향한 친부의 일그러진 모닥불 앞,, 타인의 글로 등단했던 소설가도 나타났으며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들을 기록하기만 했으며
그렇게 로미오와 줄리엣이 된 살인범의 아들과 피해자의 동생들도
행복하게 잘 살기만 했던 그해, 1987년 여름
그 6월의 그늘이 익어가기만 했어서
그때의 노래들도 Fade Out이었어서
* KBS 월화 드라마
이로운 사기*
무엇일까
상처 받겠다는 용기는
어린 날 꿈을 현실로 만들 때 꼭 필요한 질료는
형상이 채 갖춰지기도 전에 부서지곤 하던 그것들은
산산이 부서진 꿈 앞에서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복수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우리는 과연 사랑이라는 걸 제대로 배웠던 걸까를
사람들은 쉽게 사랑을 말하곤 하지
015B처럼 인스턴트 같은 사랑 신물이 난다고 읊조린대도
조관우의 님은 먼 곳에, 님은 먼 곳에, 하며 망설이다가
사랑의 결말이 항상 그랬다
무엇일까
불굴의 의지라는 것은
젊은 날 꿈을 현실에서 맞닥뜨릴 때마다 겪는
그래서 투쟁이 아닌 인내를 더 먼저 배워야 했던 것들은
순식간에 늙어버리는 꿈 앞에서
때로는 자괴로 때로는 스스로 옭아맨 상처 속에서
우리는 과연 사랑이라는 걸 또 한번 배웠던 것일까를
사람들은 너무 쉽게 꿈들을 얘기해
혼자 노를 저으며 나아가는 항해 속에서 수평선에 피어오르던
무지개 같은 꿈들은 세상에 없어
가끔 발 끝에 걸려 넘어지곤 했던 물가의 뭉툭한 돌, 하얀 안개,
스스럼없이 지곤 하던 낙엽, 눈물짓고 웃어주던 이름없는 들꽃,
사사로우면서도 사사롭지 않은 것들이 알려주곤 해
스스로 상처 받을 수 있는 용기
도저히 꿈과 사랑 따윈 관계도 없고 세월을 터득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마음
꺾이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을 그 마음만이
사랑의 전제조건이었다는 말이지
* tvN 월화 드라마
어제 오늘 그리고
어제, 유월의 더운 바람이 두 볼을 스치고 달려가면 살짝 가을빛이 돋아나곤 했습니다 돋아난 가을빛에서 몇 줄기의 땀방울이 흐르고 우리는 저무는 유월을 땀과 함께 노래하곤 했습니다
저 막막한 광장 한가운데를 걷는 낙타 한 마리, 어슬렁대며 이쪽을 향해 두 눈을 껌벅일 때마다 한 철의 유행가들도 제각기 저물곤 했습니다 저무는 자리마다 돋아나던 석양은 이내 노을로 환해졌고…
때로는 섬광 같은 빛이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낙타의 등을 비추고, 유월의 땀방울들도 등 위에서 반짝거리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철 지난 노래들을 하나씩 봇짐 속에 넣어주곤 했습니다
오늘, 비가 그친 땡볕 사이로 홀로 광장에 서 있던 낙타를 향해 걸어갑니다 묵묵히 굽은 등으로 꼿꼿하게 서 있던 낙타는 이제야 네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았고, 그 등 위에서 반짝이던 물기를 훔쳐내면 슬쩍 올라타려던 생각을 먼저 접어야 했습니다
내일로 향해 걷는 낙타의 느릿느릿한 걸음에 지나던 행인들도 발길을 멈추곤 했습니다 저기가 광화문역이야,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광장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가벼운 침묵만이 유일한 동반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또 장마
낙타는 이제 제 갈 길을 향해서 갑니다 더는 기다림도 없이 더는 슬픔도 없이 아쉬움도 없는 광화문역 1번 출구를 다시 천천히 내려갑니다 더 이상 봇짐은 흔들리지가 않습니다
장마에 젖을 칠월의 광장엔
더 이상 낙타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 까닭입니다
장마
때 이른 소나기가 잦아지면서 우리들은 방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한꺼풀씩 떨어지던 초록빛 설렘들을 바라보는 시간 대신에 그리움을 개켜둔 가방을 꺼내 차곡차곡 쌓인 이름들을 하나둘씩 꺼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이라는 이름만큼 노역을 인내한 이력이 또 있었을까는 모르겠습니다 저마다 그 전통을 하나의 가문으로 여겨 제각각 다른 얼굴 다른 눈빛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고, 그들 중에서 간혹 성 안의 공주나 당나귀 고삐를 쥐던 나그네도 더러 섞이곤 했는데 그들끼리는 별 말이 없었습니다 사이좋게 지낸 적이 없었나 봅니다.
방 안 그득히 번지는 불빛, 전통을 고집한 불빛처럼 다소 희멀건 또는 시야가 흐릿한 무지개들도 더러는 공통분모가 된 채 각자의 어둠을 밝혀주곤 한 등대처럼 여겨지곤 했는데, 가스등이 백열등으로 형광등으로 플라즈마로 각각 바뀌는 동안은 누군가의 움츠러든 어깨를 외면한 채 제 앞가슴을 먼저 펴곤 했던 게 기억납니다
단 한 번의 동업조차 없던 이들을 전통의 한 가문으로 명명하기엔 다소 적절치 않다면서 누군가는 횃불을 들었고 또 어디선가 들려오던 낯익은 노래들은 횃불을 대신할만한 조약돌을 한움큼씩 쥐고 강물에 던지곤 했습니다 횃불이 식어갈 무렵이면 사람들은 차츰 강물이 유구해졌음을 물수제비로 가라앉은 돌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언제였을까요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면 모두가 익히 알던 옛 시인이 생각나고 그가 불러준 노래들을 한참 쳐다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다시 부르진 않거든요 일종의 망각이 아닌 일종의 외면이 전통을 대하는 마을의 풍습처럼 돼버렸습니다 새로운 장마가 곧 시작됩니다
한 떨기 바람도 거센 태풍들도 이제 곧 찾아올 텐데 전통을 잊는 마을에서 새로운 기억이 생겨나진 않았습니다 혹여 이사를 한 그들이 다시 찾아올까 주저하던 그리움도 도통 가방 안을 벗어나지 못한 그 밤, 이윽고 한 마리 풍뎅이처럼 가벼이 날아들던 벌레들의 울음소리만 가득했습니다 날 잊지 마세요, 날 버리지 말아요
장마는 곧 지게 마련인 법입니다 하지만 장마를 끝으로 더는 못 보게 될 이름들이 늘어날까를 두려워합니다
더는 이름 붙이지 않아도 좋을 새로운 형용사는 장마라는 오랜 전통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987년 여름
시위대의 피로도가 최고조에 다다를 즈음,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정의를 산산조각 낸 "민주정의당"의 전략참모는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 이제 곧 장마입니다 가두시위한텐 최대의 타격지점이 될 겁니다 일주일만 버틴다면 오히려 우리들한테 승산이 있습니다
애국가가 시청앞을 가득 메운 주말, 시위대를 향한 최루탄에 물약을 넣기 시작했고 점덤 더 다가오는 장맛비 소식에 다들 일기예보를 가장 중요한 첩보라 여기기 시작했고 때때로 기상 캐스터들이 한강에 빠져 죽은 변사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어느 한 시인이 연단에 올라 목청껏 외쳤다
- 나는 너다
- 화엄광주다
그 시인은 석관동 한예종 캠퍼스 안에서 살해당했고
동생이 대신하여 머리띠를 묶었다
함께 시와 경제를 쓰던 박노해는 "노동의 어스름한 새벽"을 3년 앞당겨 출간하기로 결정했는데
화엄광주의 아침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이윽고 장마,
기나긴 보름의 장마기간 동안 안전을 기획하기 위한 "안전기획부"는 시위대 명단을 비로소 입수했으며 가가호호를 방문해 불온세력들을 강제연행하였다 가장 고전적인 레토릭의 "Be the Reds"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남대문시장에서 티셔츠를 판던 한 대학생이 시청앞 광장에서 “나부터 잡아가라!” 오른쪽 주먹을 불끈 쥐고 손을 흔들었는데 들렸던 노래들은 "그녀의 웃음소리뿐"
정부는 추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야 개헌 발표를 했고 장충체육관에 모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께서는 총통제의 실시와 의회의 해산을 전격적으로 의결했단다
김구의 제자였던 백기완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로도 더 이상 개헌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7년의 IMF는 빨갱이들의 내란음모 탓이었다)
김현이 죽었고
천상병이 죽었고
김남주가 죽었고
김광석이 죽었고
채광석이 죽었다
박영근이 죽었고
박경리가 죽었고
최인훈이 죽었고
이청준이 죽었고
김세균이 죽었고
리영희가 죽었고
최일남이 죽었다
2023년 여름,
돼지 한 마리가 새로운 총통에 올랐다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찬탈한 국가의 집권당은 "자유민주를 수호하는 충성스런 국민들의 힘의 면적"이었다 자충국면을 다스리는 명명법에 많은 이들이 환호했고 조지 오웰은 아예 금서가 됐다 좌우를 막론한 이 메가트렌드는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다
돼지는 신성한 동물이야
필론의 돼지를 쓴 소설가가 문체부 장관에 올랐고
필론의 돼지들처럼 사는 게 지식인들의 책무가 됐고
더러는 암퇘지의 후일담 같은 가십을 즐기곤 했다
어두움 죽음의 시대 내 친구는
굵은 눈물 붉은 피 흘리며
역사가 부른다 멀고 험한 길을
북소리 울리며 사라져 간다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없다 해도
그 눈동자 별빛 속에 빛나네
내 맘 속의 영혼으로 살아 살아
이 어둠을 사르리 사르리
이 장벽을 부수리 부수리
"친구의 시"를 썼던 한 소설가는 "2016년의 한 소설가에게"를 개작해 등단을 했고 등단마저 거부를 했고
다시 광화문 광장,
GTX 광화문역을 설치하라며 머리띠를 묶고 목청을 높였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 사사로운 외침을
힙보이 뿐인 여름
작가란 무엇인가
"놀랍도록 진지함"이라고,
김수영문학상 심사평에서
황지우 시인이 말했었지
조정권의 <산정묘지>였지,
외우고 쓰게 했던 문학회 방
후배가 취해 내게 물었었지
오빠한텐 시가 과연 뭐예요?
답도 없는 소주만 마셨었지
후배가 대종상 각본상을 탔고
난 구직을 위해 면접 보던 날
다른 후배한테도 전화를 걸며
대종상 수상을 축하해줬는데
도통 연락도 없더라 나쁜 년
(알고 봤더니 백상도 탔더라)
뒤늦게 다시 묻는다 시는
작가는 뭐냐고 대체 뭘 하냐고
내게 묻는다 술을 다시 꺼낸다
어젯밤엔 부끄러워서 쓴다고
답했다 오늘은 미안해서 쓴다
김언이 또 말했다, 대체 뭐가?
언젠가... 우리가 물이 되어
물처럼 우리가 흐르고나면
소리없이 저무는 강가에도
한 송이 들꽃을 쳐다보거나
반쯤 걸린 달빛을 본다거나
희미한 안개를 마주할 때면
어떤 고결한 경지에 이르러
더는 다시 묻지 않아도 좋을
이름 하나 얻을 수 있다면야
<河 己 失 音 官 頭 登 可>
혹여 나도 답할 수 있으련만...
뿅뿅
내가 네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넌 그저 포탄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넌 내게 하나의 뿅뿅이 되었다
망치소리도 났고
북한소식도 들려줬고
전자오락실 추억도 정겹고
했다
넌 내게 말했다
사랑은 왜 슬픔보다 아픈 거냐고
내가 답했지
사랑은 뿅, 뿅, 가는 거야
영미 누나가 말했었다
너, 그거, 뼈도 못추리는 거야?
서른에 잔치 끝났다며 떠나더라
뿅뿅은 아프다
뿅뿅은 사랑이다
뿅뿅은 덧없음이다
뿅뿅은 민주주의다
뿅뿅은 사회주의다
뿅뿅은 대한민국이다
뿅뿅은 방탄소년단이다
뿅뿅은 레드제플린이다
뿅뿅은 빠리쟝워크웨이스다
뿅뿅은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다
마음을 아껴 쓰도록
사랑은 없어 있다면
헌신만 있을 뿐이야
단식농성
지금부터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저기 보이시죠 정의당이라는 정의도 없는 당에서 나와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반대한다며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저 당에 대해 알고 계시죠 저런 사람들이 그동안 이 나라를 얼마나 망쳐왔습니까 지난 정권에서 얼마나 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망가뜨렸습니까 그 정부의 하수인인 저런 사람들을 우리가 뭐라고 부르죠 그렇습니다 저 사람들은 그 빨갱이입니다 빨갱이들이 이 나라를 그동안 얼마나 망쳤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과거에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모르겠다면서 왜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온통 헤집고 혼란을 부추깁니까 저 이정미라는 여자가 며칠 전부터 이곳에 나와서 단식농성을 계속 한다고 합니다 이정미라는 여자가 또 누굽니까 인천연합이라는 좌파단체 출신으로 과거엔 민주노동당, 또 통합진보당 같은 순 빨갱이 단체 소속이던 여자 아니었습니까 이젠 정의당 대표라고 합니다 누굴 위한 정의입니까 무엇을 위한 단식농성입니까 경찰 아저씨들, 저 사람들 싸그리 잡아들여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수호하여야 합니다 왜 우리한테만 질서를 지키라고 합니까 저 사람들은 집회해도 왜 잡아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저 사람들이 일본 핵폐기물 오염수 방류는 절대 안 된다고 합니다 왜 안됩니까 바로 옆 중국에서는 오염수를 버리지 않습니까 중국도 이미 오염수를 방류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또 안 버립니까 우리나라도 이미 오염수를 방류하고 있습니까 그것들은 그럼 안전합니까 왜 일본 오염수는 안전하지 않다며 국민들한테 거짓말을 하는 겁니까......
점심시간, 회사 앞
도서관을 다녀온 뒤에 곧장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길목이 하필 일본 대사관 앞
이정미 대표가 말없이 가만히 앉아 누군가의 말을 듣고만 있다 어제 점심 때도 본 얼굴인데 또 나왔나 싶어 주변을 보니 희멀건 팻말 하나 서 있다 "이정미 대표 단식농성 3일째"
당원들도 없고 승려들 몇몇이 서서 길 가는 행인들한테 서명을 받고 있고 팻말들은 어지럽게 세워져 있었다
"일본 핵폐기물 오염수 방류 방침 즉각 철회하라"
"자자손손 재앙이 될 핵폐기물 결사반대"......
같은 구호들이 제각각으로 나부껴 순간 어지럽다 구토가 인다
건널목을 건너면 길 가는 행인들의 대화가 이내 귓가에 들려, 옆 식당이 더 맛있대, 내일은 다른 데 가보자, 그래서 이번 업체랑 계약을 할 거야, 등등이 반대집회 현장을 무심코 관통하며 무리를 지어 흐르고
순간의 몇몇만이 그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이정미 대표는 여전히 말 한 마디 없고
단식농성 3일째면 아직 끼니도 익숙치 않을 텐데 하는 걱정도 들고
단식농성을 하다 결국 대처 총리한테 아사를 당한 영국의 한 정치가도 생각났고
단식농성을 하며 언제 한 번 제 뜻을 관철시킨 적 있었나를 문득 돌이켜 본다
시를 쓴답시고 단 한 줄도 쓰지를 못한 채
반대집회 현장만을 낱낱이 기록해둔다는 일
이것도 시냐, 이것도 시다 외치고플만한 시대에
얼마 전에 '동태의 안부'를 묻던 오염수가 싫은 내가
오늘 단식농성 3일째인 나홀로 정의당 이정미 대표가
피해서 걷는 행인들한테 기어코 볼펜을 내보이는 승려가
건너편에서 악다구니를 쏟는 기자회견장의 또 다른 단체가
묵묵히 밥을 먹고 사무실로 도로 향하는 회사 직원들의 눈빛이
숨막히는 더위를 피해 어디라도 숨을 곳을 찾아야 할 유월, 여름에
장마
이윽고 장마, 칠월의 여름
같은 제목으로 일흔 편의 시를 쓴 선배가 있고
내게선 그만큼 더 멀리서만 오래 내리던 장마,
문득 그 선배가 떠올라 같은 제목의 시를 쓴다
간밤의 수퍼문이 어스름한 달무리로 바뀔 때
열대야가 삼킨 길가에서 혹 마중이라도 했나
잠자리보다 이른 아침부터 불쑥 찾아온 장마,
내내 나는 안녕치가 못하다
우산을 편다, 비로소 저녁
같은 이름을 단 제목들이 시집 한권을 채우고
같은 이름의 또 다른 시인들을 읽는 동안에도
그들이 쓴 시가 들려준 빗소리는 슬픔이었나
혹은 기쁨이었나, 모르겠다
칠월의 장마는 예고도 없이
그동안 내겐 그리움도 없이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면서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시는 어디까지고 편견
영원을 꿈꾸지 않는다
우리가 각자의 사연을 품고 달려가면 그 목적지는 늘 같았을까, 저문 강가에 앉을 때면 부르는 노래들 서로 달랐는데 느릿한 곡조와 랩을 한데 섞어 꿈이라 불러도 좋았을까
획일적이지 않은 게 좋아
가장 획일적인 체제 앞에 누구도 반항을 않고
반항하는 건 유치한 짓이야
조로증에 걸렸다
헌법보다 변증법을 더 믿어
여기까진 진리야
변증법이 통용되는 말의 질서 속, 수천 수만 개의 단어들 중 골라냈던 것들이 곧 사상이지
알 수 없는 말들 대신에
더 큰 울림은 없었을까 몰라
오민석의 시를 다시 읽는다
한길문학 창간호
교수가 된 그도 꿈을 이뤘을까
아닐 거다
때때금 퇴근하는 전철 안에서 최인훈 선생을 만난 적 있다던 사람들이 있다 때때금 그리운 이름
황지우도 시를 접었는데
도무지 알 길 없는 원고지에 꿈을 적고
어느 곳을 향해 질주하려는가
두둥실 얼굴이 아름다운 달빛에 비친
나지막한 독백도 양심적이면 괜찮아
그렇게 일기를 썼어
시는 아니야
때때금 눈물짓고 웃어주는 들꽃들에 관하여
지금은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들에 관하여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들에 관하여
알 수 없었던 들장미 핀 환상의 나라에 관하여
거친 운명의 반려자 같던 친구들에 관하여
술잔을 남겨놓고 간 동지들에 관하여
시를 썼었지
올해는 장마가 유독 길어
여름엔 사십 도가 넘는대
하면서도, 더는 알 길 없는 시는
누군가 시가 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시를 묻는다면
시가 아닌 것이 시가 되고
시가 시가 아닌 것이 된 시대
그걸 묻는다면
독립문역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기 시작했다
칠월의 지하철은 시월의 한복판
남여노소 가릴 것 없는 긴 팔이 유행이다
햇볕에 살이 타니까 보기 흉하잖아
기침을 한 할아버지 주변엔 사람이 없고
스마트폰으로 라디오 볼륨을 크게 켠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쿠시마 핵오염수를…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올해 최저임금이…
일산신도시와 덕양구와 은평구를 거치는
소음은 줄지 않고 사람들은 더 빽빽해지고
한 여학생은 카카오톡으로 미쳤나 봐 ㅋㅋ
시간은 자꾸 가는데 회사는 다가오는데*
서로를 밀쳐내고 비명소리에 어깨싸움을
하는 동안에도 긴 팔에 땀은 흐르지 않고
녹번과 무악재를 거쳐 홍제까지 도착하면
이제는 만원이라서 더는 발 붙일 데도 없는
사람들이 알아서 곱게 침묵하기 시작했고
알아서 차곡차곡 움직이는 행렬의 포개짐
이윽고 경복궁역 또 안국역 또 종로3가면
우루루 쏟아져 나온 사람들 손사래를 쳤고
제각기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아휴 살았다
몇몇은 크게 또 고함을 질러 경찰이 왔고
뒤돌아보고 싶지만 손짓도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누군가의 어깨 밑 고개도 박은 채
다음 역은 을지로3가, 을지로3가 역입니다
* 송창식, 한번쯤 (1974)
장마가 숨을 고를 때
밤새 추적추적 내린 호우주의보는 이제 후쿠오카를 향하고, 후쿠시마가 아니라서 한숨을 돌려 여행을 떠나는 고라니들에겐 잘 다녀오라며 손짓을 하고 고라니도 잘 다녀오겠다 하고
여름 한철을 강조하듯 땅 위에 마구 찍어댄 음표들에서 철 지난 레게를 한참 듣고 이내 곧 지워지겠지, 하며 발끝으로 음표 몇을 툭 차는 동안
우산을 쓰지도 않은 이강인 선수는 Parisienne Walkways를 듣고 우산을 뒤집어쓴 이정미 대표는 율곡로 한복판에서 노래를 불러줄 이도 없는 단식농성 17일째가 됐고
도서관을 향하다 문득 서서 나직한 노래 한 곡조라도 부른다면 피켓을 들고 비를 맞는 저 사람한테도 작은 위안이 될까 모르겠는데
비가 그쳐 다행이야,
그들은 왜 탈당을 했나 몰라,
진중권 교수는 징계를 받았다지,
팔월이면 일본에서 방류를 시작한댔어,
돌이킬 수 있을까 몰라,
한없는 무력감 앞에서 시위를 한다는 건 참으로 굴욕적인 일이야 그치,
벌레들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고, 정강이에 몇 번을 물렸나 몰라 부어오른 채 애꿎은 담배꽁초들을 욕하고
시간만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야,
가장 무책임하고도 참혹한 말,
신춘문예 심사평들을 읽고 베끼며 맞는 아침은 고요히 한강을 건너려는 참인데, 오늘은 해가 뜨지도 않고 요란스럽게 출발하는 차들이 적막감을 깨우고
이윽고 새들이 울기 시작하면,
어느덧 다시 밝아오는 아침,
며칠 후면 다시 찾아올 장마
운전과 전운과 전우의 우정
매캐한 도심의 전운,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거침없이 질주하던 운전병과 소속 김일병은 고장이 난 신호등 앞에서 더는 페달을 힘껏 밟지 못했다
두고 온 하사관과 하사관의 사과를 훔쳐 먹던 조이병의 안부는 어땠을까 하사관은 지금쯤 조이병을 용서했을까
운전대 앞에서 전운과 무관한 전우의 기억을 되살린다는 간 지극히 독 같은 일, 전우란 무엇일까
서로의 사과를 훔쳐먹는 사이면 모를까 옛 애인을 갈취해 외출을 나간 하사관을 두고 전우들끼리는 말도 많았었지
야, 빨리 타
하사관님이 아직 안 오셨습니다
그러면 나 혼자 먼저 갈게
네, 알겠습니다
타인에 대한 명령은 곧 책임감
다시 힘주어 페달에 발끝을 올려도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 고의일까 회피일까
한강이 저 앞인데, 다리를 끊으면 안되는데
조급해진 탓에 엄마 생각부터 먼저 났어
그래서 널 버린 거야
미안해, 하면서도 유턴은 금물이지
선대부터 내려온 전통은 이런 거지
지하철 빈 좌석을 향해, 식권 한 장을 향해
나부터만 살아남는 게 엿같은 진리로 말야
끝내 페달을 밟는 김일병,
유턴을 감행한다
네번째로 여자한테 차인 하사관이, 영문도 모른 채 라면을 끓이고 있을 조이병이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
우정은 진실보다 훨씬 더 진하다*는 걸 알면서
끝내 소리치면서
우정? 개떡같은 소리!
인류애야, 인류애!
* 황인숙,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 수상소감 중
딱따구리의 진화과정
바닷가, 갈매기
천적을 피해 여린 몸을 딱딱한 껍질로 에워싼 보호본능이 있고 딱딱한 껍질을 쪼개 먹는 큰 부리를 갖는 새가 있고
나무껍질 아래 움튼 싹들이 에워싼 공간
까라라라륵 까라라라륵 노랫소리로 다다닥 나무를 후벼파면 벌레도 나오고 나무 깊숙한 곳에 알도 심어두었을 텐데
딱따구리는 생각을 했어
나무껍질이 왜 저렇게 딱딱한 걸까 다다닥 깨부수지 말라며 수십 년을 기어코 지켜보겠다는 의지였을 텐데
단 한 번 지켜준 적 없는 나무의 그늘을 보며 왜 진작 몰랐을까를 반성해봤어
더는 나무를 후벼파지 않을래
벌레도 기어나오고 알이 부화해 새끼들이 재잭대는 동안, 기어코 나무는 제 그늘마저 내어주고 고동빛 수액을 조금씩 땅 밑으로 흘려주었지
더는 자라지도 않는 나무가 되었지
이윽고 천둥소리와 함께 쓰러져
더는 그늘을 줄 수 없고 더는 수액도 내뿜지 않는 나무, 가지 위에 앉아 그늘을 한탄하던 딱따구리
흘깃 제 이마를 쳐다보곤 스스로 말을 해
지키고 싶은 게 곧 인생이야
내 부리의 목적 또한 새끼들이었을 뿐
더는 남의 껍질을 쪼아대지 않을래
바닷가, 부리 없는 갈매기가 등장했어
조개는 껍질이 아닌 독을 뿜으니까
생각을 바꿔봐야 했어
그래야 살아남곤 했어
악귀*
문을 열었네
모든 선의가 꺾이고 땅에 떨어져 눈앞이 캄캄할 때
어쩔 수 없이 품게 되는 이기
자본주의가 평생 동안 강요해온 그것
악귀다
문을 열지 마세요
누군가의 희생 위에 내 밥그릇을 놓지 마세요
어쩔 수 없다는 말, 역겨워요
평생 동안 그것만 실천하다 가신 분들도 있어요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지 말아주세요
물론 김은희 작가도 그걸 쓴 건 아니죠
작품은 이미 독자들의 몫일 뿐인 거죠
작가가 무어라 했든 뭔 상관이래요
'킹덤'에도 마키아벨리즘이 나왔잖아요
마키아벨리즘을 지지하든 말든
선택은 독자가 하는 거니까요
산영이가 선택한 길, 맞아요
그렇게 생각해요
더 궁금한 건
왜 악귀는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느냐죠
펄펄 끓는 21세기 인류사의 여름처럼요
* SBS 드라마
보름만 참으면 돼
1994년의 불볕더위 속
리어카 한 대를 끌고 섭씨 사십 도를 육박하던 골목길을, 음료수를 몇 번 샀는지도 몰라
후배랑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윽고 한 시간만에 도착한 이삿짐을 풀며 안도의 한숨
사달이 난 건 그날 밤이었는데 도무지 잠을 설쳐 여름방학이 아니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옥상에 물을 여러 번 뿌려 열을 식히고 방 안에 선풍기를 최대로 틀고 새벽을 맞던 기억
2023년의 불볕더위 속
사상 최대의 고온을 기록한 일본 열도 소식에 이은 소나기 몇 차례,
사람들은 "지구가 펄펄 끓는다"며 호들갑이지만, 대부분은 긴 침묵으로 잘만 버티는 중
"지구 멸망의 날인 줄 알았다"는 여의도의 폭우도 금세 그쳤고 햇볕은 쨍쨍하기만 해서
서 있기만 해도 금세 땀이 줄줄 흐르고
출근하는 길에 문득 광복절을 생각했어
그날도 아마 한 해 중 가장 무더운 날이었겠지
전쟁통 속에 얼마나들 더웠을까 얼마나들 힘겨웠을까
또 그날은 얼마나들 기뻐했을까 환희가 넘쳤을까
그렇게 보름만 참으면 돼
아무리 뜨겁던 여름도 그렇게 되면 제 풀에 꺾여
이윽고 찾아오는 초가을 바람 한 줄기, 또 한 줄기, 또 한 줄기가 차츰 열기를 식혀내고
추석을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러면 모든 게 다 선선해졌어
보름만 참아내면 될까, 모르겠어
보름을 참아도 달라지지 않는 건 내년 여름이 또 온다는 거
보름이 문제가 아니고 내년 내후년, 그 다음이 문제라는 거
리바운드*
실패가 실패가 아닌 기회임을
긍정의 마인드로 계속 되풀이하면
어느덧 인디언 기우제를 닮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
능력이 아닌 인내라는 말
리바운드를 잡는 건 결국 겸손함
실패할 수 있다는 자각과 용기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담대함
유일한 성공의 원천이 그렇다
이 지나칠만큼 넉넉한 낙관이
사회주의한텐 단 한 번 있었을까
이유를 숭늉처럼만 찾던 그 과오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일
* 영화 (장항준, 2023)
소울*
시를 쓰면 어떻든 등단할 줄 알았어
등단하면 시집도 곧 나올 줄 알았어
하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일 뿐이라는 걸
열정이 아닌 인내라는 걸 알았어
오늘도 시집을 읽어
진은영도 오십 줄에 문학상을 탄 걸
다들 견디고 수련하는 게 시라는 걸
알았어
오늘도 시집을 또 읽고 또
그저 쓰는 게 일상이 됨을
알았어
* 영화 (픽사, 2020)
시*
사과를 볼 때마다
그해 늦겨울이 생각나곤 했어
말로 하는 걸 대신해 학교 앞 구멍가게를 찾아
사과 한톨을 사서 불쑥 건네주던 그때,
내 어눌한 말뜻을 알아챘는지 몰라서
그때 내 사과를 받아들였는지 몰라서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늘 궁금했어
미안해 할 때마다
그 이듬해 늦겨울이 또 생각나곤 했어
햇빛이 부시도록 쏟아지던 네 집 거실
아무 말없이 함께 마주해 있던 두어 시간
끝끝내 내 입을 나온 말이 희망이었나 몰라
두 볼이 발그스레한 수줍음의 표정에서
어쩌면 내게 첫사랑을 느꼈었나 몰라서
차디찬 졸업식장을 나올 때부터 늘 궁금했어
소설을 쓰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박하사탕을 깨물던 추억을 잊을 수 없어
시대를 관통해온 정의가 영화로 춤추고
남루한 현실주의를 온통 시에 담으면
윤정희도 옷을 벗고 김희라는 돈을 냈고
더 이상 포스트모던 따윈 없었는데
왜 해마다 나온 시집들은 포스트모던 뿐일까
늘 궁금해 했어 조잡한 마크의 공산품처럼
이른 새벽의 더위는 이내 선풍기를 틀고
선풍기 없이 지낸다던 한 시인이 생각났고
사람 자체가 시라던 한 선배도 생각이 났어
그런 게 시야, 하며 늘 말갛게 웃던
* 영화 (이창동, 2010)
시*
마음 한켠 스산할 적마다
갈대가 있는 물가에서 사진을 찍곤 했습니다
사진 속 얼굴들과 투명한 빛을 내던 잎들이
일기의 한 페이지를 꾸미곤 했죠
오늘도 어김없이 돈은 모자라고
이웃들과의 한 끼도 돈입니다
남루해지지 않기 위해 노동을 하며
불안한 미래를 꿈꾸곤 했는데
도무지 알 길이 없는 노래는
빌보드에도 나오고 차 안에도 흘러나옵니다
기억하는 가수들한텐 고맙고 때론 미안해
가끔씩 안부를 묻듯 제목을 훔쳐봅니다
시를 써야지, 하는 생각이면
길가에 핀 꽃한테도 먼저 인사를 했겠죠
그런 마음으로 네잎 클로버를 줍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를 꼭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 영화 (이창동, 2010)
올빼미*
불이 꺼지고 실루엣이 선명해지면
홰를 치며 제 날개를 펴는 시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죽음들과
아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밀애를
아무도 기억해내지 못할 밀거래를
두 눈으로 똑똑하게 보는 시간
끔찍한 진실 앞에 마주서게 되면
사실은 불행한 것 참혹한 것
눈 감고 살아라 귀 닫고 살아라
그래야 살아남는다
오늘도 출근길에서 눈을 감았고
퇴근길에는 귀를 닫은 채로 살며
더 이상 날개조차 펴지 않는 시간
지하철역 묻지마 칼부림이 등등한
2023년 팔월의 살인적 여름
* 영화 (안태진, 2022)
새벽, 처진 풀잎에 영근 네 눈물도*
한밤중에 뒤척이다 잠도 못 이룬 채
오랜 그림자를 향해 편지를 쓰곤 해
죽다가 살아 돌아온 내 어린 시절을
이미 죽어 사라진 옛 이름을 적었어
끝도 없는 배경음이 된 매미들만큼
알 수 없는 말들로만 연신 속살대며
걷지 않는 자가 되지 않으리, 말했지
비에 젖고 땀투성이인 채 걷던 여름
바람이 분다던 네 대답도 기뻤는데,
바람이 불던 빈 자리만 남아 있고...
편지를 접어놓은 채 창문을 젖히면
새벽, 처진 풀잎에 영근 네 눈물도
오래된 그림자로 다시 찾아오곤 해
그림자에 발을 맞춰 딛는 순간에도
사라졌던 옛 이름들이 또 생각났어
다시는 못올 네 젊음의 뒤안길에는
또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겠고
눈물처럼 웃던 여린 들꽃들을 보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임도 알았어
* 진은영, 청혼
그리움이 그림이 되고 글이 되고*
그림을 그린다는 일
한 점을 찍고 원 하나를 그리면
하나의 상징이 되곤 했지
만화영화에도 드라마에도 SF에서도
그렇게 주술이 되었어
원 하나 그려놓고 시를 쓴다는 일
책상 위 낙서처럼 보잘 것 없을
금세 지워질 일들만 남은
촉각만 곤두세운 미련들
그리움이 그림이 되고 또 시가 되어
그림 속에서 지난 얼굴을 찾고
시 속에서 지난 목소리를 찾고
시가 된 글 속에서 사랑을 찾고
그리움이 그림이 되고
그리움이 글이 된다면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단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까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눈물지으며 웃어주는
말간 들꽃들처럼*
너를 사랑해
보고싶어,
너의 희망을
너의 기쁨을
듣고싶어,
너의 노래를
*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내 보금자리, 폐허
쿵쾅거리던 소음은 심장이 아닌 대지에 울려퍼지고
심장을 껴안던 추억들이 산산이 흩어져 요란스럽고
굴삭기가 파헤친 폐허에도 새 추억들이 자라난다면
내 보금자리도 혹은 저 폐허 속 어딘가에 숨었을까?
오로라 공주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은 오요 이름은 로라 Laura 브래니건은 ‘글로리아’를 불렀는데 더 글로리에 나온 문동은이 웃으며 손뼉을 쳤고 영광은 늘 복수를 전제로 해 꿈꾸는 법이란 희대의 망언을 남겼고 복수할 상대가 없어 조현병에 걸린 악성범죄들이 들끓고 철없던 아이들은 바닷가로 가서 종아리를 걷어붙인 채 뛰놀았고 이미 철이 든 시인들은 기괴한 상형문자로 시를 썼고 아무도 읽지 않았고 때묻은 책장 안에서 이문재의 시편을 꺼내봐도 도통 메타포는 존재치 않았고 박준의 시집 안에서 새벽 두시에 청진옥을 호명했고 청진옥 위치가 어딘지 몰라 네이버 지도를 켜니 무슨 빌딩 안에 꼭꼭 숨었고 그리움들이 저마다 그 언저리에 다들 꼭꼭 잘 숨었겠지 하며 도로 책장을 덮었는데 노르웨이에 산다던 잼버리 일행이 알몸을 훤히 드러낸 샤워장 모습에 기겁을 해 연일 영국의 일간지인 <가디언>한테 뭇매를 맞고 호사가들은 ‘곰’과 ‘굥’을 연신 성토하기만 하는데 기회가 닿는다면 북극에 가서 오로라를 볼 수 있겠는데 하며 내심 초대해주길 바라지만 한번도 그 근처에 가본 적은 없고 그렇다면 북극은 이제 외계일까 머스크가 화성부터 점령한다고 했는데 화성보다도 더 먼 이웃나라일 뿐인가 하는 생각에 지척에 둔 섬나라도 생각났고 또 더 가까운 절대왕정도 생각이 났어 성은 오요 이름은 로라 Laura 로자 하면 룩셈부르크 생각이 나 더 환영받기도 할 텐데 아니지 숙청을 당했겠지 갈 수 없는 나라일 뿐인데 성은 오요 이름은 로라 Laura 하면 글로벌 취향에는 딱 제격인데 영 한자로는 서툴러서 그냥 영어로 Laura 하기만 했을 텐데
* 이제니,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늙음을 이긴다는 것은*
인간은 늙어가는 동물
아이가 금세 어른이 되고
청춘은 금세 또 노년이 된다
인류의 오천년 역사에도 세상살이들은 켜켜이 묻혀
어떤 이들은 한 세기 가까이를 살았고
또 어떤 세대는 반 세기만에 요절했고
그렇게 보면 대략 백여 세대쯤이 흘렀다
현대를 대략 삼대가 살면 얼추 3%가 된다
인류사의 3%를 갖고 이렇듯 아둥바둥 사는 거다
자본주의가 길면 얼마나 길 것이며
또 아무도 오지 않는다 말한 세상은
결국 어떻든간에 찾아올 것이다
더 이상 체제논쟁 따위를 않는 까닭이다
다만 내 세대에서 과연 무엇이 바뀔까,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를 보면
막막해진다…
별로 없을 것 같아서다
그래서 기다린다는 것
늙음을 이긴다는 것은
결국 굴욕을 감수하는 일일 뿐이다
일제 때의 해방도
지난 시절의 민주화 때도 그렇듯이
결국 때가 되면 되는 법일 뿐
그 때가 너무 멀다는 깨달음
그래서 늙음을 이긴다는 것은
그저 기다린다는 것일 뿐
여전히 넉넉한 마음이지만
항상 초조하게 불안하게
* 박노해, 가리봉 시장
음악들*
음표가 없는 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선율이 있다면, 꽤 익숙하고도 낯선 화음들이 공중에 퍼지면 하늘 위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면 저절로 걸음을 멈춰 음표들을 찾기 시작하면. 이윽고 전기기타의 독주가 울려퍼지면 비로소 아아 그 노래, 하며 반가이 맞고. 내겐 길거리가 곧 콘서트장이고, 길가에 빼꼼히 놓인 스피커도 웅장한 앰프가 되고 가슴은 쿵쾅대면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만 하고, 먼 시절의 나를 추억하듯 저절로 몸이 가벼워져 발끝에 힘을 주고 내내 음표들을 새겨넣으면.
때로는 길가에서 마주친 인연들이 제법 가벼울 때가 많아서, 깔깔대며 웃는 교복입은 학생들은 두 손을 펼치며 하나의 율동이 되고, 단 한 번 춤을 춘 적 없는 내가 발끝을 까닥이면 금세 구두 끝이 닳아서. 그 시절의 내가 사랑한 화면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가방을 찾아 넣으면.
어느새 노래가 끝나면, 다시 웅웅대는 소음들을 향해 걸으면, 머물렀던 순간들을 지운 채 총총히 재촉하는 거리의 끝에선 항상 말갛게 핀 햇빛이 눈부시기만 해서.
* 박정대, 음악들
일 없습니다*
제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늘 그렇듯이 남의 눈물이 내 눈에 들어온들 기쁨이겠습니까 어스름한 새벽 내내 한참 동안이나 빗소리를 듣는 팔월의 아침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광복절을 코앞에 둔 채 잼버리가 동네북 신세가 된 뉴스들과 태풍 소식들로 점철된 화면 속에서 단 한번 핵폐기수 반대집회가 등장하지 않는 건 참으로 유감스런 일입니다 팔월에 방류를 하겠다고 무슨 선전포고마냥 저리도 뻔뻔한 섬나라 원숭이들한테 단 한차례 쓴소리를 않는 글로벌 협력체제란 도대체 무얼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멸망의 공동체인지 탐욕의 공동자본인지조차 헷갈립니다 아무도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 없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육십첩반상을 물어보셨길래 연안부두 근처에 있던 식당들을 대뜸 소개하면서 속으로는 '내가 과연 그곳들을 다시 찾을까' 싶기도 해 괜시리 말을 꺼냈나 후회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아무 말이 없어서 아무 일 없습니다
또 어떤 분이 만일 섬나라에서 핵폐기수를 방류한 다음에도 그곳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으신다면 더더욱 제겐 그럴 일 없을 것 같다는 답변 뿐입니다 그래서 일 없습니다
* 박준, 여름의 일
에필로그
여름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길목, 강가에서 아직도 푸른 강아지풀과 노랗게 들뜨기 시작한 갈대들이 대화하는 장면을 지켜봅니다
이곳 임진강 옆으로 녹슨 탱크들이 몇 우두커니 선 채 아무 말이 없고 그녀는 아마도 저 탱크 안으로 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는 찾지 않겠습니다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를 마르고 닳도록 살아가는 동안, 다른 도시들의 안부가 훨씬 더 궁금하곤 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살갑고 행복한가에 대해 글을 쓰고자 했습니다
난데없이 무슨 탱크냐며 그녀가 돌아와 웃습니다 제 곁에 앉습니다 함께 따라 웃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일이 없습니다 때때로 사상과 연애는 일장춘몽과도 같아서입니다
메마른 땅 위에 마지막 장마를 견뎌낸 나뭇잎 몇 장, 인생의 쓸쓸함은 이런 고된 수고로움의 지극히 사소하고도 못마땅한 결과물 뿐인지도 모릅니다 그걸 견뎌내는 일 역시 겸허함을 요구할 테지만요
여전히 시를 쓰지만 시는 이제 일기가 더 가깝다고 느끼는 편이고요 그래서 도중에 그만둘 리도 없을 일상 그 자체입니다 가끔씩 안부가 섞인 혹은 돌출된 감정의 맨 마지막 한마디를 어찌어찌 담아내려는 것일 뿐
소설을 보고 영화를 읽고 음악을 그리고 화폭을 노래하는 동안만큼은 그렇게 계속 시를 씁니다 시가 곧 소설이요 평론이자 그것들은 계속 그렇게 시로 남습니다
고색창연한 가을의 문턱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은 질병
천연두, 치명적 상처
풋풋한 청춘의 두 남녀가
부둥켜 안고 밤새 운 일들
지독하게 아름다운 추억,
기억해도 안될 사연들은
기억할수록 더 멀어질 것들
깊고도 깊은 상처가 된 손금
두 눈 멀게 할 독약같은 슬픔
기억할수록 아프기만 할 일은
쓰디쓴 알약만큼 고통인 날들
죽어도 못잊을 천형의 그림자,
그래서
소유할 수밖에 없던 애달픈
너무나 아프기만 한 사랑은
더 이상 사랑도 아니었음을
가난한 '클래식'**이었음을
* 류근
** 곽재용
노르웨이의 숲을 가보셨습니까
매미 한 마리 살지 않는 그곳
노르웨이에 살았다는 미도리랑
발랄한 춤을 춰보신 적 있습니까
자작나무들 울창한 눈길 사이
하얀 개 한 마리 뛰어들던 그곳
추억의 그림자, 밟아보셨는지요
아직은 이른 새벽입니다
어둡고 낯선 그리움은 지척인데
망각의 열차는 눈길을 헤쳐갈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삿짐에서 꺼낸 이진경의 책과
치열히 씨름한 이십대도 있었고
가방에서 꺼내든 동창의 고백을
남몰래 찢었던 삼십대가 있었고
여전히 이른 새벽인데
헤어짐을 추억한 그가 있었으며
그가 남긴 말을 함께 추억합니다
너무 바쁘면 외로울 틈도 없어서
너무 바빠서 외롭지 못하다는
너무 바쁘고자 노력했다는
몸보다 마음이 바빴다는
그에게 입 맞추던 순간
노르웨이 하늘로 솟구친 한 마리
매미의 추억도 알고 계셨습니까
나랏말싸미*
그랬다지
오랑캐들이나 쓰는 말이라고
아낙네들이나 쓰는 말이라고
마치 지난 시절의 마르크스처럼
조롱섞인 터부시와 멸시 속에서
굳건한 기개는 수도승의 몫
강경한 지조는 신념의 그림자
그 그림자를 쫓아 기억한 말
좋은 세상 만드세요
그 말이 슬펐지
우리들 중 그런 말 없었어서
모두가 투항범이 된 21세기
이제 와 무슨 뒷북이냐며
아직도 낡은 이념 뿐이냐며
정작 ‘시대정신’은 벙어리로
못한 비굴함으로
유자들만도 못할 찌질함으로
뭐 그리 잘났다며 살았는가
그랬다지
어느 신춘문예 당선소감에서
아름답고 절실하고 성스러운
우리들의 모국어는
그래서 명예로운 시인들은
연봉 삼백만 원짜리 인생들은
저마다 알바를 꿈꾼다지
모국아로는 도통 돈을 못벌어
인스타그램을 한다지
유튜브를 한다고 하지
부끄럽지 않다고들 하지
황제의 신하일 뿐인 임금이
시대를 말하지 않는 기교가
더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 조철현, 2019
가을비 우산 속*
새벽 세 시까지 빗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른 새벽, 빗소리를 함께 듣고 있어요
그리움은 눈물이 눈물은 또 빗물이 돼
낙엽처럼 진다던 노랫말을 기억해요
우산 속 낙엽 소리는 세월을 닮아가고
그만큼씩 닳아가는 익숙한 정서예요
각자의 살뜰한 살림을 지키며 우리는
사소한 일상을 겪고 또 나누기도 해
사소함을 알고 그렇지 않음을 알기에
함께 웃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빗소리를 닮은 낙엽처럼 닳는 사랑은
그저 속절없는 기다림이었을 뿐임을
기다려도 항상 오지 않았던 것 뿐임을
알면서 또 행하지도 못했던 것 뿐임을
알면서도 또 다시 사랑하는 것 뿐임을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아끼면서 더 보살피기로 해요
서로한테 함께 더 아파해주기로 해요
각자의 안부를 위로하고 더 응원해요
그러므로,
전화번호 주세요
일 년에 두어 번 인사 드릴게요
- 일본이 핵폐기수 수만 톤을 방류하기로 한 날, 타오르는 투쟁심을 정제하고자 쓴 글
* 최헌, 1978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은
안하느니만 못한 거예요
의심과 질투로 눈 멀게 하고
말의 십자가엔 오해를 걸었어요
기억도 못할 약속은
기어코 후회하는 법
섣부른 이별의 말은
이불 밖 그리움만큼 위험하죠
단 하나 미제사건도
결코 낭만적이지 못한 거예요
부인이 남편을 살해하고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동안
해는 망각을 향해 질주했어요
누가 어찌 이걸
사랑이라고 하나요
* 박찬욱, 2022
처연한 그리움과 초연한 무지개 사이
- 정독, 종로학파
무릇 비평은 마케팅의 도구로 오남용되지 않아야 하며, 또 다른 새로운 창작임을 늘 잊지 않아온 편이다.
이 글은 단테, 종로학파의 첫 시집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에 관한 제3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다가서는 기억들, 그 옆 언저리에서
지금 이렇게 어깨 처진 얼굴들은
또 왜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일까
고단하게 떠나는 자리에서
석양이 남겨둔 속삭임은
그 파리하게 떨고 있는 허공은
무엇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 '동지들 남긴 술잔엔' 중
단테, 종로학파의 시들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한 단어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젠 아주 고색창연하기만 한 말이 된 '변증법'일 것 같다.
한때는 독일 고전철학의 최전선에서, 또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교범으로도 인용해온 이 단어는 크게 세 가지 법칙을 갖는다. 첫째, 대립물의 통일과 갈등의 법칙과 둘째, 양질전화의 법칙 그리고 셋째, 부정의 부정의 법칙 등인데 특히 '다이내믹스 Dynamics'를 주되게 다루는 모든 학문 분야들에서 그 효용성은 배가되기도 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형이상학적 논리학이 철저히 무시되는 건 또 아니지만)
그렇게 와르르 머릿속과는 전혀 상관없게
저 혼자 법석을 떨던 것들 말이지
그 어지러운 것들 속에서
저렇게 한 점 맑기만 한 것
- '태풍의 눈' 중
이른바 '공동체' 정신을 지향하는 듯한 어투의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으로 시작해 유장하게 펼쳐낸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에 이르기까지의 근본적 정서는 결국 '그리움'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또 이는 매우 긴 분량의 장시인 '봄날, 연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모습이다.)
단테, 종로학파의 시들이 표현해낸 '그리움'의 정서는 때때로 올망졸망한 추억들이거나 또 어쩌면 애달프고도 처절한 슬픔의 또 다른 독백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것들이 과거에로의 회귀보다는 항상 '미래'를 더 지향하고 있음에서 종전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양태를 갖는다.
사랑하는 친구여, 저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일까
긴 노를 저으며 흐르고 있는, 저 섬과 육지를 오가는
거친 운명의 반려자는 누구일까
- '만약에 나한테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게 있다면' 중
반면에 시인이 계속 꺼내놓은 큰 화두 중 또 하나인 '전망'의 지점에 이르러서는 여전히 불분명한 모자이크 또는 개략적인 삽화 정도에 그치고 있는 사실은 동시대가 겪고 있는 '희망'의 현 주소를 아직까지는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함께 웅변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인이 주로 천착해온 듯한 김수영, 황지우, 송기원, 이문재 그리고 곽재구, 임동확 또는 이제니, 진은영 등과의 조우를 통해 어떤 힌트라도 얻고자 하는 노력이 역력해 보여도, 결국 시인은 이를 스스로가 아닌 '우리'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을 던져놓는다. (다분히 연애시 같은 어투로 붙여놓은 시집 제목 또한 은연중에 이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낙타는 슬쩍 내 손을 잡았지,
내 손은 그의 볼을 꼬집으며
함께 웃겠지
너는 나라고
벽은 문이고
-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중
창작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다소 '올드'한 창법을 적지 않게 구사하는 중인데 이는 아마도 시인 스스로가 밝혀놓은 "사숙했던" 인물들 중에선 단연 박정대 시인의 그것과도 조금은 닮지 않았나 싶다. 박정대, 하면 우리가 대뜸 떠올릴만한 스타일 역시 '낭만'이겠다. 이제는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이 '낭만적'임을 구태여 기치로 내건 이유가 좀 궁금해진다. (제 아무리 '포스트모던'이 횡행하는 시대라 해도 결국 '인본주의'의 정서만큼은 여전히 '근대적' 심상에 머물기 때문인데)
때로는 길가에서 마주친 인연들이 제법 가벼울 때가 많아서, 깔깔대며 웃는 교복입은 학생들은 두 손을 펼치며 하나의 율동이 되고, 단 한 번 춤을 춘 적 없는 내가 발끝을 까닥이면 금세 구두 끝이 닳아서. 그 시절의 내가 사랑한 화면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가방을 찾아 넣으면.
어느새 노래가 끝나면, 다시 웅웅대는 소음들을 향해 걸으면, 머물렀던 순간들을 지운 채 총총히 재촉하는 거리의 끝에선 항상 말갛게 핀 햇빛이 눈부시기만 해서.
- '음악들' 중
처연한 '그리움'의 정서는 본질적으로 '과거'와 맞닿는 역할일 수밖에 없다.
또 반대로는, 현실에서의 시련과 마음의 가난함을 꼿꼿이 버텨내는 초연함의 태도가 지극히도 나이브한 상징 하나로 꺼내놓는 '무지개' 같은 정서야말로 어쩌면 이 보잘 것 없는 시대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과도 같을 역할이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점에 한해서는 과연 '미래'를 지향한다고도 볼 수가 있겠어서)
비록 등대만큼 환한 불빛으로 모든 배들이 숨죽여 지켜볼만한 명징함이 부족해 보인다 해도, 어쩌면 이 희미한 불빛 또 그 나지막한 목소리들을 통해 한 줄기 위안이라도 건네려는 수줍은 심경, 또는 그 험로들을 가로지르려는 가교 역할과도 같을 일종의 '제안'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면? 맨 마지막 물음이다.
고개 숙여 떠나는 사람들 이제 가로등 불빛처럼 또 다른 흔적을 찾고, 그렇게 찾은 자리마다 새로운 그리움이 약동하는 시간을 꿈꾸고, 다시 사람들 모여들 시간이면 이 술집에도 지난 그 노래가 들리겠는지
- '겨울, 그리운 집' 중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발행일 : 2023년 9월 3일
지은이 : 단테, 종로학파
출판사 : 퍼플
출판등록 : 제 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 1544-1900
홈페이지 : www.kyobobook.co.kr
ⓒ 단테, 종로학파 2023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으셔야 합니다.
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발행일 : 2024년 3월 31일
지은이 : 단테, 종로학파
펴낸이 : 한건희
펴낸곳 : 주식회사 부크크
출판등록 : 2014.07.15 (제2014-16호)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1로 119 SK트윈타워 A동 305호
전화 : 1670-8316
메일 : info@bookk.co.kr
ISBN : 979-11-410-7849-2
www.bookk.co.kr
ⓒ 단테, 종로학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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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발행일 : 2024년 3월 31일
지은이 : 단테, 종로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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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곳 : 주식회사 부크크
출판등록 : 2014.07.15 (제2014-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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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를 우리라 불러봤으면
발행일 : 초판 1쇄 2023년 9월 3일
초판 2쇄 2024년 4월 5일
지은이 : 단테, 종로학파
출판사 : 퍼플
출판등록 : 제 300-2012-167호 (2012년 9월 7일)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종로1가 1번지
대표전화 : 154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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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국판 (초판 2쇄, 퍼플, 2024년 4월 5일) :
※ 국배판 (초판 2쇄) :
※ 신국판, 전자책 (BOOKK, 2024) :
(압축파일)
※ 신국판 (1차 교정) :
※ 국배판 (1차 교정) :
※ 신국판 (초판, 퍼플, 2023년 9월 3일) :
※ 국배판 (초판) :
※ 국판, 조판수정 (BOOKK, 2024) : 배율 75%, 좌우 및 상하 여백 20mm 적용
※ 국판, Realigned :
※ 국판, Initializ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