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2019년 제2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8. 1. 08:36





2019년 제2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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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는 감시와 착취, 죽음과 절망이 도처에 존재하는 시대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는 시집이다. 시인의 주변을 포함하여 세월호로부터 아우슈비츠, 아프리카 초원의 누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에 편재한 죽음의 증후들 속에서 비극적 인식의 언어를 거침없이 토로하면서 이제까지는 없었던 전혀 다른 시세계를 보여준 이 시집이 리얼리즘 시의 예리한 갱신을 이루었다고 평가되어 올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평 중에)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나희덕 시인이 데뷔 30년차에 백석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3년 뒤의 대산문학상 수상까지를 합해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창비 주관 3대 문학상 및 현대문학상과 대산문학상까지를 두번째로 모두 수상하는 대단한 위업을 달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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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서정시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줌
손톱 몇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통인지
숲에서 자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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