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문단소식] 문학동네 여름호 (2023)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7. 11. 11:34




여름, 점심


  

[문단소식] 문학동네 2023 여름호 : 

 

 

 

   대기만성  

 

 

 

   김상혁 

 

 

 

   나더러 그런 사람 아니라는 말 좋지 밤으 공동주택 단지 나와 닮은 이웃들 홀린 유리구슬들 같은 기적 없는 시대가 한 자루에 담긴 듯 얌전하게 시끄러운데 내 얼굴에 다른 사람 보인다는 말 나쁘지 않지 긴 복도의 센서 등 나를 놓치고 불을 밝혀주지 않을 때 이 짧은 순간 신scene처럼 마법처럼 그러므로 다시 시간은 멈추게 될까? 이쯤에서 내 인생은 한번 휘감겨 되돌아가는가? 누군가 현관문 열고 닫는다 도시는 빛을 피할 길이 없다 옷이 화려한 사람 힘이 센 사람은 만나기 불편하다 나더러 이런 곳에 있을 분 아니라는 말 세계가 누추해서 인간이 빛난다는 말 어쩔 수 없지 오늘 이만하면 됐다 싶지 대단한 결심을 세웠다는 듯 모든 문 앞에서 나는 망설이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집에는 설거지가 쌓이고 있다 대기만성 

   대기만성, 나는 우리가 비슷한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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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이 살고 고구마 

 

 

 

   김상혁 

 

 

 

   밤에 부엌에 서서 혼자 고구마를 먹는데 앞으로 몇 년은 쩝쩝대는 소리처럼 뻔하겠다 싶은 것이죠 너가 뭔가를 잘못한 건 아니에요 각자가 포기한 만큼 우리 인생은 보답을 받고 있거든요 밤에 부엌에 서서 두 개째 먹으면서 뭉친 모래도 아니고 사람이 허물어질 리 없는데 몸의 가장자리 붙들고 산다 느끼거든요 삶은 고구마쯤 먹는데 식탁에 앉기도 뭐하고 쥐죽은듯 넓어지는 밤 창밖이나 바라보니 인생 알아서 굴러간다는 말 실감하거든요 멍청하게 서서 가슴을 치다가 너를 잃고 싶진 않아요 너 잃고 혼자서 먹어보는 고구마가 궁금할 뿐 밤에 부엌에 서서 세 개째 삼키면서 인간들 참 무섭다 하루에 열 번씩 화내면서 좋은 날 모자 쓰고 산책하고 얼굴은 별로 주름도 없는 것이죠 그러다 사랑하는 너 죽으면 나의 인생 제멋대로 구르겠네 생각하고 있거든요 너가 언제 삶았는지 모를 열 개쯤 남은 고구마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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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가 나오는 영화  

 

 

 

   황인찬  

 

 

 

   시간을 나누고 함께 밥 먹고 

   또 때로 함께 잠드는 이것이 사랑이라니 

 

   군부대 생활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네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이 군인이겠지 

 

   무료한 젊은이들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를 말없이 보네 

 

   어쩐 일인지 그건 공리가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게 <붉은 수수밭>인지 <귀주 이야기>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네 

 

   "이거 보자고 한 사람 누구야" 

 

   영화가 끝나고 젊은이 중 하나는 화를 냈는데 

   사실 그건 영화를 보자고 했던 것이 부끄러워 꺼낸 말 

 

   공리가 나오는 영화는 감동적이었지만, 젊은이들은 다들 눈가에 물기가 어린 채 말이 없었네 

 

   "미안해, 내가 그랬어" 

 

   다른 젊은이가 침묵을 깨고 사과를 했네 갑자기 혼자서 엉엉 울었네 밤늦은 시간이 되어 모두 잠들어야만 했고 

 

   군부대 생활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했네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이 군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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