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은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 메모 ::
"당대의 대표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박준 시인한테 그 호칭을 붙여줄 것 같다.
현대시가 갖는 주요 스타일 중에서는 인스타그램의 감성, 짧은 시, 아름다운 언어 등을 주되게 구사해온, 사실은 정통파다. 또 '본격문학'이다. (이 단어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많이들 쓰니까)
국내 시단의 큰 흐름 중 하나였던 '미래파'와는 사실 거리가 좀 있는 편. 추상미술과 구상미술 간의 변증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