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노트

산책

단테, 연초록, 정독, 그리고 종로학파 2024. 6. 10. 07:11

      
  
    
   침묵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 김명인, 길의 침묵 (문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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