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라는 구석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 이병률,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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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움츠려 앉은 구석에서 눈물이 빛날 때
목요일 아침을 여는 시로 적절한가는 잘 모르겠지만, 또 하나의 서정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건 그래도 괜찮은 편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몇몇 익숙한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울음이 타는 강, 비가, 사평역에서, 같은 제목들을 갖는 시들을 보면서 한 시절을 달래놓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슬픔의 무게는 시절들마다 제각각이어서 때로는 빛나고 또 때로는 끈적끈적한 질감의 포즈를 취하기도 합니다. 그 슬픔의 "구석"을 내건 사소함들이 시인의 현명한 선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용래의 그것도, 박재삼의 그것도, 또 최하림의 그것과 곽재구의 그것들도 아닌 조금은 더 여린 마음과 사소한 감정 같은 걸 일컫기 위함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TV에 처음 나온 박노해 시인이 직접 낭송하던 '너의 하늘을 보아'를 들었던 때도 문득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지난 시대는 절망과 슬픔마저 온통 "시대"라는 감옥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면, 이제 비로소 그 자유로운 몸의 "구석"을 찬찬히 들여다볼 시대가 될 수 있었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시절을 온몸으로 관통해온 시인의 이름들도 꽤 기억하는 편이고요.
이병률 시인을 처음 본 건 지난 2010년께의 어느 언저리였던 것 같은데, 꽤 익숙해진 신춘문예도 문지나 창비의 데뷔시집들도 아닌 트위터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마치 인스타그램 같은 걸로 생각되기도 하는데)
국내 포털 서비스들이 통제를 받기 시작하면서 부쩍 대두된 당시의 해외 서비스들이 어느덧 제법 익숙한 일상이 된 채 아무렇지 않게들 이용하는 걸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낄만도 한 법이겠죠.
몇구절에 불과한 짤막한 문장들로도 위안을 얻던 시대도 있었고 지금은 아예 더 큰 '유행'도 됐습니다. 지난 그 시절을 함께 버텨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인한테 고마움을 표해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