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필사 (또는 "인용")에 대하여
저는 모든 종류의 책을 필사합니다. 단 분량이 너무 많은 장편이나 철학서 등은 다른 분들 사진을 찍듯이 필요한 문단만 따로 발췌해 옮겨놓곤 해요.
나중에 들춰보면 종종 도움이 되거든요.
그리고 글쓰기 입장에서는 필사가 그리 큰 도움은 못 되는 것 같아요. (즉 필사는 '기억의 보존' 목적이 더 크죠)
“모작”의 시도가 좀 더 효과적이라 생각해요.
“순수하게 트레이싱으로 그린 그림은 원판에 대고 베껴 그리는 방식이라서 모작보다 난이도가 떨어진다. 난이도가 낮은 만큼 배울 수 있는 한계도 극명하게 낮다. 트레이싱을 하는 데에도 테크닉이 있긴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트레이싱 테크닉을 숙련하는 의미는 많이 떨어진 상황이다.
실력향상 수단으로 보자면 모작은 최고의 효율을 가지고 있다. 모사할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된 작품을 매우 디테일한 부분까지 관찰한 후, 그것을 직접 구현하는 과정까지 연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실력의 기반이 갖춰지는 데에 모작은 아주 좋은 공부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https://namu.wiki/w/%EB%AA%A8%EC%9E%91
결론 : 독자 입장에선 간편하게 사진촬영하는 게 좋겠고, 작가 입장에선 모작 또는 화답시 등을 위해서도 직접 필사하는 방식을 추천 (이것을 "인용"이라고 표현해도 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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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기의 노래 (송기원)
1
무엇일까.
나의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의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섭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나의 육체에서 꺼낸 것들은.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은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은 무엇일까.
바람을 따라 한없이 풀려나며 버려진 땅, 시든 풀잎, 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날려가는 것들은.
저것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든 풀잎들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고, 죽어있던 소리들이 이슬처럼 깨쳐나 나팔꽃 같은 귓바퀴를 찾아서 비상하고……
2
누님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 저것들이 만나는 사물마다 제각기 내부를 열어 생명의 싱싱한 초산 냄새를 풍기고 겨드랑이 사이에 젖을 흘려서, 저는 더 이상 쓰러질 필요가 없습니다. 굶주려도 배고프지 않고, 병균들에게 빼앗긴 조직도 아프지 않습니다. 저의 캄캄한 내역(內譯)마저 젖물에 녹고 초산 냄새에 스며서, 누님, 저는 참으로 긴 시간 끝에 때 묻은 시선을 맑게 씻고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봅니다.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노래합니다.
격렬한 고통의 다음에는 선명한 빛깔들이 일어서서 나부끼듯이
오랜 주검 위에서 더없는 생명과 빛은 넘쳐 오르지.
깊이 묻혀 깨끗한 이들의 희생을 캐어내고,
바람의 부드러운 촉루 하나에도
돌아온 사자(死者)들의 반짝이는 고전을 보았어.
저것 봐. 열린 페이지마다 춤추는 구절들을.
익사(溺死)의 내 눈이 별로 박히어 빛을 퉁기는 것을.
모든 허물어진 관련 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질서를.
내가 품었던 암흑의 사상은 반딧불 하나로 불 밝히고
때 묻은 환자들은 밤이슬에 씻어냈어.
수시로 자라는 번뇌는 은반의 달빛으로 뒤덮고
눈부신 구름의 옷으로 나는 떠오르지.
포도알들이 그들 가장 깊은 어둠마저 빨아들여
붉은 과즙으로 융화하는 밤이면, 그들의 암거래 속에서
나도 한 알의 포도가 되어 세계를 융화하고.
3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무서운 저 광채 때문에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한 마리 야광충이 되어 깨어 있어야 하지. 저 광채 때문에 내 모든 부끄러움의 한 오라기까지 낱낱이 드러나 보이고, 어디에도 감출 수 없던 뜨거운 목소리들은 이 밤에 버려진 갈대밭에서 저리도 뚜렷한 명분으로 나부끼지.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 덩이 뜨거운 피마저 이 밤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 병든 나를 휩쓸지, 캄캄한 삶을 밝히며 가득히 차오르지.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