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호, '입춘 부근' (대한을 앞둔 채 벌써 '봄'을 기다리는)
[베껴쓰고 다시읽기] 대한을 앞둔 채 벌써 '봄'을 기다리는 :
입춘 부근
그 입춘 부근은 너무나도 따사로워 나는 제방에 걸터 앉아 못생긴 꽃의 꽃말을 외웠다. 아무도 떠나지 않은 자리에 마음이 머물던 자국만 남아 있다. 어떤 책을 펼쳐 읽어도 마음 좋은 청춘은 만날 수 없던 날, 들풀이 머리칼처럼 야윈다. 늙은 개암나무 곁에서 허리를 굽혀 봄볕의 마음을 줍는다. 내가 꽃말을 외울 때마다 거짓으로 잎순이 부풀어 올랐다. 가난한 애인과 함께 부자의 마을에서 헤픈 상대방이 되고 싶던, 내 그리움이 가시에 찔려도 터지지 않았다. 따사로운 나무둥치들이 어린 양처럼 매매 울며 어미 숲을 부른다. 쑥 냄새가 나는 길을 걸었고 그 길가에 호들갑스레 꽃 피고 여동생의 책가방에서 화장품이 쏟아졌다. 찌처럼 조용히 그늘 위로 머리만 내민 봄볕은 자기를 물고 어둠 밑으로 순식간에 내려갈 바람의 입질을 기다리고 있었다.
* 조연호, 죽음에 이르는 계절 (천년의시작, 2013)
24절기 중 첫번째인 소한을 지나 이제 대한으로 향하는 1월입니다. 한 해의 가장 큰 추위가 있을 계절인데, 그보다는 오히려 '입춘'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혹한에 익숙해져서인지 또는 봄을 그만큼 더 기다려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독히도 난해하다는 평을 들어온 조연호의 시집을 꺼냅니다. 며칠전에 필사를 한 "유고"을 펴낸 문학동네에서 2021년 판으로 새롭게 단장한 "죽음에 이르는 계절" 중의 한 편인 '입춘 부근'을 읽다 보면 추위는 이미 사그라진 채 꽃말을 외우고 애인을 그리워할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계절이 곧 봄이요, 봄볕이 가져다줄만한 가장 큰 덕목 역시 어쩌면 '바람'의 온기일 것도 같습니다.
평온한 일요일 아침 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KdMVBCG_X8E?si=SI2-d7pt_nEUjvS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