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시답지 않은 시로 등극한 '아이돌'의 현주소)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답지 않은 시로 등극한 '아이돌'의 현주소 (황인찬) :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눈을 뜨자 사람으로 가득한 강당이었고 사람들이 내 앞에 모여 있었다 녹음기를 들고 지금 심경이 어떠시냐고 묻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 말을 하라고 하고 그러나 나에게는 할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어요 하늘 아래 흔들리고 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토끼풀 같은 삶을 살아온걸요
눈을 다시 뜨니 바람 부는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지금요 더 늦을 순 없어요 자칫하면 모두가 위험해져요
무서워서 가만히 서 있는데 누가 나를 밀었고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을 뜨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힌 사람의 꿈을 꾸고 있었고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애당초 마음도 없지만
눈을 뜨니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머리를 긁고 있었네
좋아,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 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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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단의 대표주자 격인 황인찬의 시를 이제서야 꺼내놓는 이유는 그렇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된 시인이지 않은가 하는 우려, 정작 시인의 작품세계보다는 생뚱맞게도 그의 외양과 명성 쪽에 더 매몰된 듯한 희한한 분위기의 팬덤, 시를 읽고 분석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그저 뭔 소린지는 몰라도 내 취향과 입맛에 맞기 때문에 그냥 "좋다"고만 말하는 무수한 독후감들까지... 한동안 그에 대한 평가를 보류해놓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실은 올해 신춘문예를 준비하면서 일정 정도 그에 관한 실제비평을 작정해놓았던 탓일 수도)
화제의 신간인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를 교보문고에서 처음 접했던 소감은? 솔직히 말해 예전 시집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서, 별반 달라지지 않은 화법, 별반 크게 다르지 않은 주제 등이 갓 나온 시집을 빠르게 읽어내며 느꼈던 제 첫 소감이었기도 합니다. (더구나 지난 2021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이미지 사진' 등 상당수의 시편들은 이미 다른 지면들을 통해 읽었던 편이기도 해서 크게 새로울 게 없었던 점도 더러 작용하긴 했겠지만요.)
맨 앞의 허무개그 같은 말장난들을 뒤로 한 채 한참을 읽고 넘기다 보면 표제작을 만날 수 있는데요, 이 작품에서 짧게나마 그동안 느꼈던 부분을 몇 자 미리 적어놓기로 합니다. ;
뜻하지 않게 사람들은 "내 앞에 모여 있었"고 "묻고 있었"고 "자꾸 말을 하라고" 합니다만, 시인은 그럴 생각이 거의 없습니다. "할말이 없어요 심경도 없어요"는 솔직한 심경이었을 테며 급기야 "토끼풀 같은 삶"으로 스스로를 치부하기도 합니다.
여타의 작품들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시인의 스탠스는 어쩌면 일종의 '당위' 같은 것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지 않을까로 해석하곤 해왔습니다. 이번 시에서도 웬 '절벽'이 등장했으며 누군가는 또 "지금 뛰어내리셔야 합니다"고만 말합니다. (심지어 누군가한테는 떠밀리기도 했고) 이 모든 정황들에서 시인은 전혀 의도한 바도 없이, 어처구니없게도 그저 '돌연 당하고 마는' 존재입니다.
시인이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이라며 독백하는 부분은 설령 그것이 시인의 행동을 자극했거나 또는 시인 스스로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손쳐도 결코 그 "마음"을 둔 게 아니라는 뜻임을 밝힙니다. 아예 대놓고는 "토끼풀 하나가 자신이 토끼인 줄 알고" 있는 상태를 "내 마음이라고 하자"는 선언을 해버립니다. 이 대목에서 모든 '의미'는 돌연 '무의미'로 전락하게 되겠죠. (시인이 원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난 지점을 그리 해석합니다.)
사실 이런 투의 독백은 황인찬의 기존 시들에서도 충분히 나타난 면이겠죠. 의미를 거부하는 몸짓, 좀 더 정확히는 그 어떤 '의미'를 지향하는 일이 덧없거나 불가능할 것이란 믿음이 훨씬 더 큰 탓으로 읽혀집니다. 그저 사사로운, 가벼운 말장난을 섞는, 돌연 얼버무리곤 하는 말투들의 원천 역시 그런 마음과 태도들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고요. 아무튼,
정과리 교수가 예전에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젊은 시인들"에 관한 짤막한 평을 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과거의 전통적 화법과는 달리 어미 쪽에서 문법을 탈피하려는 움직임 (예를 들면 "~다"로만 끝나는 천편일률적 관행에서 "~까?" 또는 "~네" 등의 대화체가 주로 채용된다는 측면) 그리고 은유의 일차적 적용을 뛰어넘는 현상 등을 지적했었고요. (예를 들면 "의미의 부분적 일치"보다는 형상, 동작, 소리 등 모든 부면의 최소한의 유사성들로 확산해가는 움직임을 뜻하는데... 이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표현에서 아예 "잔뜩 인대가 늘어난 하늘", "무른 말에도 잘 베이는 나뭇잎들은 어떻게 초록인지"와 같은 씩씩하고도, 희롱적이면서도, 동시에 연대를 갈구하는 듯한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이런 움직임들은 단지 황인찬 시인만의 그것이 아니라 이미 2020년대를 살아가는 모든 현대시, 그가 예로 들었던 강혜빈과 류진과 박윤우와 이원하 등등을 열거하면서 총칭하고 있는 모든 "젊은 시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시류요 경향과도 같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로, 그런 것들만을 근거로 해 황인찬의 시들이 단연 '으뜸'이라고 추켜세우는 일은 좀 적절치가 않아 보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그의 데뷔시집 중 뛰어난 소품이었던 (사실상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이 된 큰 이유 중 하나였던)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에서처럼 끝끝내 둔탁하고 묵직하면서도 그저 담담했던, 반대로 그 내면은 온통 '치열함'일 뿐인 시인만의 어조가 가장 돋보일만한 지점들은 따로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면 무덤덤해진 그리움, 속절없는 안타까움, 딱히 정해지지 않은 방향에 관한 물음 내지 방황 따위가 어쩌면 이런 부분들에 해당될 터인데... 실제로 대부분의 시들이 그런 뉘앙스로들 읽히면서도 마치 이것들만이 이 시대를 대표할만한 어떤 '정서'의 차원쯤으로 해독되어 전파되곤 하는 '오버스러움'에 대해선 여전히 무척 달갑지 않은 현상이라는 입장인 탓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시인 스스로가, 훨씬 더 점층적인 해법에 의한 처연함이거나 슬픔과도 같을 독백의 처방일지라도, 괜시리 '겉멋' 따위가 아닌 진솔함으로 와닿는 새로운 화법을 발견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혹은, 그저 "덧없다"는 말 한마디로도 충분할 기이한 '히키코모리'의 세계를 벗어나 좀 더 낯설고 두려운 또 다른 '장소'를, 또 다른 '진지'를 물색해야 할 시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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