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 (가장 현대적인, 가장 가까운 정서로서의 ‘서정’)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
박준
길눈이 어두운 겨울이나
사람을 잃은 사람이
며칠을 머물다 떠나는 길
떠난 그 자리로
가난한 밤이 숨어드는 길
시래기처럼 마냥 늘어진 길
바람이 손을 털고 불어드는 길
사람의 이름으로
지어지지 못하는 글자들을
내가 오래 생각해보는 길
골목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림자로 남고
좁고 긴 골목의 끝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다 지새워지는 길
달이 크고
밝은 날이면
별들도 잠시 내려와
인가(人家)의
불빛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가는 길
다 헐어버린 내 입속처럼
당신이 자주 넘어져 있는 길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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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현대적인, 가장 가까운 정서로서의 ‘서정’
현대시들이 갖는 특징들 중 하나는 한 두 행마다 연갈이를 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박준의 시집 뿐만이 아닌 황인찬의 그것들 속에도 자주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제니의 시집들은 반대로 한 문장을 시로 쓰는 경우도 꽤 많지만요.)
크게 보면, 독자들이 행간을 읽으며 스스로 이미지를 지어낼 줄 알게 된다는 게 가장 큰 메리트요 반대로 무성의한 행갈이로 비추어질 수도 있어 오히려 독해에 방해가 될 경우도 적잖습니다.
여린 듯하면서도 매우 견고한 그의 시어들은 차분히 응축된 형상화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갈고 닦은 우리의 시편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표현들을 눈부시게 구사하는 장면은 박준의 시들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이지 않을까 합니다.
“입속에서 넘어지는 하루”도 그렇겠지만 “가난한 밤이 숨어”들고 “시래기마냥 늘어진” 듯하면서도 “바람이 손을 털고 불어드는” 길은 다양한 변주 속에서 제 하나의 심상을 갖게 만듭니다. 그건 “오래 생각해보는” 일이기도 하며, “하루가 다 지새워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성거리다가 가는” 일이며, 또 “당신이 자주 넘어져 있는” 일들은 모두 사랑, 그리움, 흔적, 연민 같은 단어들을 저절로 떠오르게 만들죠… 직접 그것들을 단 한 차례도 꺼내지 않습니다만, 저절로 부르게 되는 이 정서를 어쩌면 ‘서정’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1세기의 가파른 ‘미래파’ 열풍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가 지켜온 이 ‘서정’의 버팀목은 무엇일까를 한참 생각해보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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