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D-9.
녹번동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놓았다 네모를 그려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 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으로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 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짧은 편지 ::
최근에 주변 문우들한테 "응모하셨는가?"를 여쭙는 게 제 인사법입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여러 이유들로 신춘문예를 포기한 까닭은 '등단'의 벽을 절감케 만드는 말들 뿐이었으며, 그때마다 전 '등단'보다 더 중요한 건 '출간'이라는 말로 애써 격려와 응원을 보내곤 합니다.
'등단'의 기준만을 놓고 보면 사실 신춘문예도 더 이상 그 등용문이 되긴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 2013년에 '등단'을 한 이해존 시인의 경우도 웬만한 타 문예지 공모전 수상자들에 밀려서인지 지면을 겨우 할애받은 건 무려 5년이나 더 지나서, 실천문학을 통해 가능했죠... 이 데뷔작은 데뷔시집이 발간된 5년 후에나 서점의 시집코너 또는 도서관 서고 등에도 꽂힐 수 있게 됐습니다. (예전에 소개해드렸던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목재소에서' 역시 무려 20년 후에 출간된 데뷔시집으로 인해 2014년에야 비로소 정독도서관의 시집코너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더더욱 '등단'보다는 '출간'이 훨씬 더 늦을 수 있다는 점, 그래서 '등단' 자체에 굳이 연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출판권력에 대한 '집착'이 어쩌면 이 문제의 근원이 아닐까도 좀 반성해야 할 시점은 아닐까 해 굳이 말을 꺼내봅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어제는 진도를 뽑지 못해 저 또한 남은 일정이 매우 촉박해졌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계속 모든 분들도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건필의 전제조건은 결국 건강한 '일상'이기 때문이죠. 글보다는 '삶'이 우선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qmlUuTvKUpU?si=bBvLWw4SrncRsEy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