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D-10.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 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 톱밥의 불꽃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짧은 편지 ::
1980년 오월,
모두가 숨죽여 울어야만 했던 시절을 겪고 고요히 일어난 새해의 정초를 연 첫 시는 '사평역에서'였습니다.
'시대를 외면하지 말자'.
그동안 시를 써온 모든 이들한테 늘상 하고팠던 말들 중 하나입니다.
'역대최고'와 같은 수사는 필요없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중 한 편인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으로 시작하는 11월 하순, 첫 아침입니다.
아직 퇴고를 끝마치지 못한 분들께서는 좀 초조해질 무렵인데, 저 역시 마찬가지 형편입니다. 주초에 탈고까지 마무리하려면 시간만이 문제가 될 듯하네요... 다들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정말로 짧은 편지입니다.
신청곡은 YB 6집의 '잊을게'입니다.
https://youtu.be/4-O-wWuTvKY?si=8jGSwnugYLUEeTr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