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D-11.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회복기의 노래 (송기원)
1
무엇일까.
나의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의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섭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나의 육체에서 꺼낸 것들은.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은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은 무엇일까.
바람을 따라 한없이 풀려나며 버려진 땅, 시든 풀잎, 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날려가는 것들은.
저것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든 풀잎들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고, 죽어있던 소리들이 이슬처럼 깨쳐나 나팔꽃 같은 귓바퀴를 찾아서 비상하고……
2
누님.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 저것들이 만나는 사물마다 제각기 내부를 열어 생명의 싱싱한 초산 냄새를 풍기고 겨드랑이 사이에 젖을 흘려서, 저는 더 이상 쓰러질 필요가 없습니다. 굶주려도 배고프지 않고, 병균들에게 빼앗긴 조직도 아프지 않습니다. 저의 캄캄한 내역마저 젖물에 녹고 초산 냄새에 스며서, 누님, 저는 참으로 긴 시간 끝에 때묻은 시선을 맑게 씻고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봅니다.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노래합니다.
격렬한 고통의 다음에는 선명한 빛깔들이 일어서서 나부끼듯이
오랜 주검 위에서 더없는 생명과 빛은 넘쳐 오르지.
열린 밤하늘과 수풀 있는 언덕에서
깊이 묻혀 깨끗한 이들의 희생을 캐어내고,
바람의 부드러운 촉루 하나에도
돌아온 사자들의 반짝이는 고전을 보았어.
저것 봐. 열린 페이지마다 춤추는 구절들을.
익사의 내 눈이 별로 박히어 빛을 퉁기는 것을.
모든 허물어진 관련 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질서를.
내가 품었던 암흑의 사상은 반딧불 하나로 불 밝히고
때묻은 활자들은 밤이슬에 씻어냈어.
수시로 자라는 번뇌는 은반의 달빛으로 뒤덮고
눈부신 구름의 옷으로 나는 떠오르지.
포도알들이 그들 가장 깊은 어둠마저 빨아들여
붉은 과즙으로 융화하는 밤이면, 그들의 암거래 속에서
나도 한알의 포도가 되어 세계를 융화하고.
3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무서운 저 광채 때문에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한마리 야광충이 되어 깨어 있어야 하지. 저 광채 때문에 내 모든 부끄러움의 한 오라기까지 낱낱이 드러나 보이고, 어디에도 감출 수 없던 뜨거운 목소리들은 이밤에 버려진 갈대밭에서 저리도 뚜렷한 명분으로 나부끼지.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덩이 뜨거운 피마저 이밤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 병든 나를 휩쓸지. 캄캄한 삶을 밝히며 가득히 차오르지.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 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 짧은 편지 ::
"훌륭한 시를 낸 송기원에게 감사한다... 송기원은 시적 체험을 감성으로 느끼며 상상적 절제로 응시하여 일정한 시적 진술에 이르는 능력을 가졌다. 우리는 그의 진술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우리는 그가 이 능력을 시와 시간의 진실에 보다 크게 봉사하는데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심사평, 첫번째 마디와 맺는 말)
- 당대의 달인이었던 이형기 시인, 김우창 교수가 함께 썼던 이 전무후무한 심사평이야말로 모든 신춘문예 응모자들이 가장 듣고픈 칭찬이겠습니다.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들 중 가장 빛났던 수작으로도 평가받는 이 작품을 오늘의 시편으로 소개해놓습니다. (개인적으로 현역 시인들 중 송기원의 시적 성취와 버금갈만한 면모나 수준을 기록한 경우는 작년도 창비 백석문학상 수상작에서 꼽겠습니다.)
평론 응모작을 퇴고하는 중입니다. 시와 소설은 이미 투고한 상태라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미리 써놓은 초고들을 찬찬히 다듬고 조합해 벼리는 중입니다. 다루게 될 시인들은 글의 맥락에 따라 이제니, 황인찬, 박준, 박형준, 진은영의 순이며 논란이 많았던 최근 몇 년의 김수영 문학상은 굳이 다루지 않겠습니다. (일부 신예들을 추가로 덧붙일 가능성은 있겠습니다.) 21세기 사회상과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로 전개된 '신자유주의'의 쇠퇴, '포스트모던'의 종식 또는 요즘 유독 빈번해진 'ESG' 담화 등과도 연결될 예정이며, 새로운 '인공지능' 시대의 생존방식 등에 관한 견해도 짧게 내비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조의 탄생인가? 아니면 리얼리티와 모더니티의 기계적 혼용과 혼재일 뿐인가? 이 문제가 제일 어렵겠습니다. 애써서 풀어볼 작정입니다.)
일요일입니다. 주말마다 느끼게 되는 마지막 휴일의 시작은 늘 '하루의 기쁨'이란 말을 연상시키곤 합니다.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는 여전히 가장 좋아해온 시편들 중 하나이며, "시린 가슴을 어루만질만한" 한 문장을 위해서 평생을 다하는 직업이 곧 '작가'라는 생각도 큰 변함이 없습니다.
굳이 '등단'을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책을 '출간'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즉 이미 누구나 굳이 '등단'하지 않아도 충분히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문열, 황지우, 박노해 등등... 대한민국의 가장 빛났던 작가들 중 적지 않은 이 역시 '당선'의 영광 한 번 제대로 누린 적도 없이 그저 그 길을 계속 묵묵히 걸었을 뿐입니다.)
모쪼록 더 많은 이들이 각자의 삶에서 갖는 진실함과 지혜로써 글쓰기에 평생 매진할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희망을 늘 갖고 지내는 편입니다. '작가'는 그저 "죽을 때까지 글을 쓰는 사람"일 뿐이며, 정년퇴직이라고는 '유언장'일 뿐이니까요.
행복하고도 의미있는 일요일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P.S. 가장 최근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로는 지난 2018년에 평론가 47인에 의해 새롭게 선정된 '대중가요 역대최고 명반' 순위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계속 1위였던 들국화의 데뷔앨범을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가 뛰어넘었거든요. 오늘은 그의 유일한 TV 출연 영상을 함께 올려드립니다. ('역대최고'라는 수사 역시 불변은 아님을 일깨우므로)
https://youtu.be/VlY18JiWbyo?si=VHUP87op21wcgbty